Monday, April 29, 2013

001. 누가가 설명한 조사 방법


<001. 누가가 설명한 조사 방법>
(누가복음 1:1-4)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복음서들 중에서 누가복음만이 기록 목적과 자료 수집 과정 등을 기술하고 있다. 누가는 왜 이러한 내용들을 서두에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누가의 이러한 자세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될 것인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1)
누가는 복음서 기록의 기초를 이루어진 사실fact에 두겠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것을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앞으로 기록될 내용들이 이루어진 사실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기록된 내용들이 분명한 사실에 기초를 두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불신자들은 물론이고 신자들 또는 신학자들 중 일부까지도 복음서의 내용 중 자신에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신화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 누가복음서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 의미를 깨달을 수도 없게 된다. 누가는 이러한 후세대 사람들의 의심하는 태도를 미리 내다본 것은 아닐까?
기록자는 어떤 사건을 자기 이름으로 서술함에 있어서 많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고 자신의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서 사실이 아닌 어떤 것들 또는 자기 감정이나 느낌을 첨부시킬 수 있고 거기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을 삭제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기록할 당시의 환경이나 조건 또는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서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누가는 순전히 사실에 입각해서 기록해 보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던 것 같다.
또한 우리 중에의 범위는 어디인가? 누가가 헬라인 의사였다고 하는데 이방인까지 포함한 그리스도인 신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모든 사람들 즉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까지도 의미하는 것인가? 누가복음이 오직 데오빌로 각하만을 위해서 기록되었다면 특별한 의미가 없겠지만, 이 기록을 읽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였다면 후자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아마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당신들 눈앞에서 벌어졌던 분명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한다니, 정말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2)
누가는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기 전에도 이미 많은 기록들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자들로부터 그리고 말씀(로고스)의 일꾼(종 또는 하인) 된 자들이 전하는 그대로 옮겨 적은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기록하였고 그렇게 전해 준 그대로 기록되었다면, 누가는 왜 자신이 직접 수고함으로써 또 다른 기록을 남겨야만 했을까?
여러 가지로 추론해볼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 기록들이 누가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 기록들이 처음부터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전해 준 그대로 기록했다고 주장하지만, 누가가 볼 때에는 그 기록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고, 분명하게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누가가 스스로 다짐한 내용처럼, 사람들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기보다 과장이나 첨가 또는 삭제의 과정을 통해 상대방에게 더 자극을 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누가는 이 기록들로부터도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기록들이 이미 많이 있는데, 내가 왜 굳이 이 일을 또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거기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누가는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3)
그래서 누가는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보고자 하였다.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의사는 오늘날의 과학자였다. 별자리와 천체의 운행을 연구함으로써 기후를 예측하고 인간의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누가는 상당히 이성적이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아무 비판 없이 수긍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전에 기록된 내용들 또는 말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중에는 그렇게 납득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던 것이다. 누가는 그것들을 자기 소견대로 거부하는 방향이 아니라 모든 일을그리고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보는방향을 선택하였다. 말로는 쉽지만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과연 이러한 누가의 자세를 본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가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가 복음서들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누가는 그것들을 기록하여 차례대로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냈다고 한다. 전부를 기록하여 한 번에 보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로 나누어 보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데오빌로 각하가 누가의 일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가 보고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데오빌로에게 각하라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구가가 의사 또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상당히 가까운 사이로 깊은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는 존경하는 마음에서 또는 인간적인 우정이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추진하였음을 느낄 수 있겠다. 당시에 글을 기록하는 일은 오늘날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의 가죽에 칼로 새기고 먹물을 입히든지 또는 나무 조각에 글을 써야만 했다. 게다가 전달하는 일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오늘날 이러한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까지 참 진리를 발견하여 서로 나누기를 기뻐하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있을까? 한편으로는 지극히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누가는 왜 데오빌로 각하에게 예수와 관련된 사건을 조사해서 보내고자 하였을지 생각해 보자.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데오빌로가 이미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정말로 그러하였는지 알고 싶어 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가 혼자서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사랑하는 데오빌로에게 자세히 설명해 줌으로써 그에게도 믿음이 생기기를 누가가 심히 원하였다는 것이다. 한 가지를 더 첨부한다면, 누가와 데오빌로가 함께 어느 정도의 믿음과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서로 이견을 갖고 논쟁하였을 가능성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누가는 진실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참 진리를 자신이 직접 찾아서 데오빌로 각하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는 점을 우리는 반드시 되새겨 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4)
누가가 이 일을 추진할 때 데오빌로 각하의 명령에 의해 억지로 한 것인가 아니면 자발적으로 한 것인가? 그 해답이 이 4절에 들어 있다. 그는 오직 데오빌로가 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여 누가복음을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여건을 미루어 짐작한다면, 누가는 아마도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 해를 소비하였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 먼 곳에 머물면서 또는 이방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유대인 또는 이방인 목격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확실한 근거를 찾아내기 위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또한 누가는 자신의 인생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 일에 바쳤을 것이다.
누가는 이 일을 하는 동안 피곤하였을까 아니면 행복하였을까? 아마도 육신으로는 힘들고 어려웠겠지만 마음과 정신은 큰 행복과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첫째로 자신이 확실한 증거를 얻게 된 것에 대해 그러하였을 것이고, 자신이 분명하게 발견한 그 진실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알려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그러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는 어떤 자세로 복음서를 대해야 하는가?”
그리스도 이후 거의 2천 년이 흘러갔지만,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지식이 엄청나게 확장되었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을 100% 전부 이해하고 있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얼마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나?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어떤 부분을 희생하고 진리를 위해 투자했다는데, 우리는 과연 진리를 위해 얼마나 투자해 왔으며 또한 앞으로 투자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자신이 직접 진리를 발견하여 알고 깨닫고자 하는 열정이 얼마나 있는가? 누군가가 그 수고를 하고 나는 그저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이 부끄럽다 해도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된다. 남은 인생의 한 부분을 쪼개서 누가처럼 한 번 씨름해 본다면, 누구든지 그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지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자 수고하기보다 기도하는 것이 우선이다?”
로마 카톨릭의 교황제도가 확립되면서부터 진리의 말씀은 성도들로부터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말씀을 읽거나 해석하는 일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말씀을 직접 읽고 해석하는 일은 오직 극일부분 사제들만 할 수 있는 권위가 되어버렸다. 일반 성도들은 무조건 그들의 해석과 가르침을 따라가야만 하였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의도였던가? 만약에 그러하였다면 누가는 지극히 어리석은 자였다. 누가가 심혈을 기울여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누가 역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고 추구한 것은 올바른 믿음을 갖고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믿음과 뿌리 깊은 신앙을 인간이 과연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믿음과 신앙의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그 가르침에 대한 깊은 깨달음 없이 가능한 일인가? 원시종교의 믿음체계나 샤마니즘이라면 몰라도, 하늘의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기도와 함께 이 지식과 깨달음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쉬지 않고 가르침을 주셨고, 그들의 깨달음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여러 차례 한탄하셨던 것이다. 누가는 어떠했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신앙을 추구하고 있으며 또한 추구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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