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1:19-26
(19)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I. 서론
1967년에 일어난 제3차
중동전쟁을 ‘7일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300만 명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1억 명이 넘는 이집트를 단 7일만에 항복시켰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 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이 나자, 외국에 유학하고 있던 이스라엘 유학생들과 이집트 유학생들이 동시에 모두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이유를
알고 보니,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모두 자진해서 고국으로 돌아가 군에 입대하였고, 이집트 유학생들은 억지로 끌려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몰래
도망을 갔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쉴새 없이 이집트를 공격하였는데, 어느 날 이집트 군대가 쏜 포탄에 맞아
이스라엘 전투기 한 대가 추락되었습니다. 추락된 비행기에 가 보니 그 조종사는 놀랍게도 만삭이 된 임신부였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이집트가
할 수 없이 항복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애국심 때문이었습니다. 수 천년동안 나라
없이 방황하다가 간신히 세워진 나라를 너무나도 사랑하였기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하면 항상
같이 있고싶어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서로 비슷하게 닮아갑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끼리는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억지로
같이 있었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유익이 없거나 또는 손해를 볼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언제든지 헤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서로 원수가 되어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절대로 닮아지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항상
주님과 같이 있으려 하고, 시간이 지나가면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할지라도, 주님을 닮아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주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되고, 주님의 일에 해를 끼치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II. 본론
1. 제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항상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자는 스승이 다하지 못한 사명을 이어받아서 성취시키는 사람입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제자’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그 일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많은 선지 생도들 중에서 오직 엘리사만이 엘리야를 끝까지 좇아갔습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요단강을 건너기까지 하였습니다. 다른 선지 생도들은 엘리사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엘리사만이 엘리야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이 완수하지 못한 많은 사명들을 엘리사가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제자가 된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 그렇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약 3년 반 동안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예수님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열 두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기적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였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 중에서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 넘긴 가룟유다가 나왔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가 나왔고, 부활하신 주님을
끝까지 의심한 도마가 나왔습니다. 제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예수쟁이이기는 하지만, 어설픈 예수쟁이입니다.
우리는 보통,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훈련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초대교회에서는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 제자들 중에서 나중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2. 그리스도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헬라어 원어로
'kristianos'인데,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은 놈들”이라고 욕하는 말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쟁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 유행하던 말 중에 'Herodianos'라는 말이 있었는데, “헤롯 같은 놈들” “헤롯보다 더 못된 놈들”이라고 욕하는 말이었습니다. 또
'Nazarenos'라는 말은 “나실인 같은 놈들” “나실인보다 더 지독한 놈들”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들은 외부인들이
그들을 욕하면서 비웃는 것이었지만, 그 안에 소속된 사람들은 오히려 그 욕을 듣는 것을 매우 명예롭게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자기들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붙여준 별명이었기 때문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얼마만큼 그리스도를 닮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하였으면 그런 욕을 듣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여기에 비추어 본다면,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1900년대 초반에 무언극
코미디언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날렸던 Charlie Chaplin이라는 배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매우 유명해진 다음 어느 날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는 자기 마을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명배우를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찰리 채플린 흉내내기” 시합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구경하고 있던 찰리 채플린도 신청서를 내고 무대에 올라가, 늘 자기가 하던 연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시상을 할 때에는
1,2,3등 등수에도 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본인보다도 더 잘 흉내낸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만큼 흉내내며 살고 있습니까? 얼마만큼 닮아가고 있습니까? 시간이 많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닮은
구석이 별로 없는 것은 아닙니까? 처음에는 많이 닮은 듯 하였으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의 모습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모습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토대로 하여, 안디옥에 있었던 제자들이 3.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게 된
비결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그들은 안디옥에서 1) 함께 사역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으로 말미암아 핍박이 일어나고 제자들이 각처에 흩어져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그들이 각자 따로 사역하고 있는 동안에는 오직
제자라는 칭호는 받았을 뿐,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는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36절에 의하면 바나바는 레위인 출신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절에 의하면 바울은 베냐민 지파였고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서로 출신이 다르고 소유한 달란트가 다르고 받은 사명이 달랐지만, 그들은
안디옥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고 ‘나’ 중심으로 하면, 비록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 중심의 태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마음을 하나로 묶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진리교회는 목사와 평신도가 주님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뭉치고 연합하여서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처럼 변화된 말을 하고 행동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들은 안디옥에서
2) 모여 있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모두 여기 저기 흩어져서 그리고 돌아 다녀가면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들은 제자라는 칭호는 받을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는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며 모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의 무리들과
확실하게 구별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공동체의 목적과 특성이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지게 되었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방인들의
결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니 아무 교회나 가면 어떠냐?”라고 말하면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여기,
바로 이 자리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나무는 곧 시들어서 말라버리는 것처럼,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성도들의
신앙도 곧 말라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옮겨 다니는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만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여기, 바로 이 자리, 진리교회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실 때, 주를 믿지
아니하던 허다한 무리가 돌아오고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되며, 진리교회 안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안디옥에서 3)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르침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그렇게 변화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계속 재생산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세상에 통용되는
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받아들여 실천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있었으나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교육을 받고 삶이 변화되는 역사는 별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때가 그대로 묻어 있는 인격이나
성격은 결코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칭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교회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못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여러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진리교회는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교회가 됩시다. 세상의 때를 벗겨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받아 온전함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가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됩시다.
III. 결론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그저 이름만 있는 어설픈 예수쟁이의 수준을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주님의 뒤를 바짝 좇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정말 예수를 닮은 사람” “예수쟁이”라는 칭호를 받아봅시다. 그것은 명예로운 이름이요 영광된 이름이요 또한 주님 앞에 서게 될 그
날에 면류관을 받게 할 이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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