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로마서 6:1-5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I. 서론
긴 겨울이 지나고 이젠 봄기운이 완연해졌고, 뒷마당에 있는 사과나무에도
가지마다 순이 돋아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떤 것이 잎이 되는 순이고 어떤 것이 꽃이 피는 순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똑같은 진액이 뿌리로부터 줄기를 타고 전해지겠지만, 잎이 나오는 순으로 가면 잎이 되고 꽃이 나오는 순으로 가면 꽃이 됩니다.
가을이 되면 잎은 시들고 말라서 낙엽이 되어 사라지지만, 꽃에는 열매가 맺히고 씨앗이 만들어져서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무엇을 향해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여기 동전이 하나 있습니다. 이 동전에는 분명히 양쪽
면이 있습니다. 한 쪽 면이 있으면 반드시 반대편의 다른 면도 있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 동전의 한 쪽 면만 보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육신의 죽음입니다. 동전의 반대편은 결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비록 동전의 반대편 면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반대편이 바로 죽음과 반대되는 부활입니다. 죽음을 향해서 사는 사람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지만, 죽음의 저편 즉 부활을 향하여 사는 사람은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II. 본론
그 1.
부활의 첫 열매를 이룩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죽음의 저편 즉 부활이 숨겨진 비밀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증거 하듯이, 예수님이 부활하여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비로소 모든 인간들이 부활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그 부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아무리 역사적인 사실이었고 우주적인 사건이었다
하더라도, 만일 그 부활이 나 자신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기뻐하고
있다면, 그 부활이 내 것이 되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우리 조상들 중에 예외 없이 다
그러하였던 것처럼 여러분도 육신의 장막을 벗게 될 때에,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살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도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사랑하는 분들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되시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 부활을 성취하시겠습니까? 돈을 많이 투자하면 되겠습니까?
박사학위를 열 개쯤 따면 되겠습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면 가능할까요? 아주 좋은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서 그 속에 묻히면 되겠습니까? 시신
속에 방부제를 넣어서 몇 천 년이 지나가도 썩지 않게 하면 될까요? 시신을 금종이와 은종이로 싸고 각종 보석으로 치장하면
어떨까요?
2. 부활을 위해 예수께서 하신 일
예수님은 2,000여년 전,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혔다가, 약속하셨던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여러 신자들이 분명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심령 속에서 성령님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부활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이 부활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부활을 위해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우리들도 똑같이 하기만 한다면, 우리들도 역시 부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을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기 위해 돈을 모으지도 않았습니다. 건강을 유지해서 하루라도 더 살아보려고 노력한 일도 없었습니다.
박사학위는 고사하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셨습니다. 그에게 무슨 세상 권세가 있었습니까? 죽은 후에 묻힐 좋은 무덤 하나라도 마련해
놓으셨습니까? 제자들에게 부탁해서 좋은 향료와 깨끗한 세마포를 준비하라고 유언이라도 하셨습니까?
성경에서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위하여 하신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고는,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무참히 돌아가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부활을
성취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과 연합된다면,
예수님과의 동질성을 소유한다면,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들도 고난 당하고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활의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3.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저는 오늘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지식의
욕심을 죽이는 일입니다. 지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 지식을 오직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습득하고 사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발전하면 결국 죽음을 가져옵니다. 부활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바로 그 죽음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세상의 System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여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지식을 쌓아가게
합니다. 그것을 위해 인생을 걸고 목숨을 바치게 합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살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7절로 40절 말씀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말씀을 완전하게
실천하셨으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고난과 죽음의 결과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나의 유익만을
위하여 생각하고 계획하는 마음을 죽여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의 유익을 위하여 생각하고 계획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열매가
맺힙니다.
둘째는, 2) 감정의 욕심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인간의 감정은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도 인간적인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잃어버렸던 양을 찾는
목자의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성전이 돈을 버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보실 때에는 무서울 정도로 분노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을 철저히 죽이셨던 분입니다. 그 결과가 부활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정 표현에 비하여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또는 교회에서 문제들이 생기는 근원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들 각자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있으면 기뻐하고 내가 손해보는 것 같아서 화를 내고,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슬퍼합니다. 나의 형편만 생각하면서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는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점점 더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점점 더 감각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웃이나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통제하고 인내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감정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성공과 축복을 자랑하고 싶어도, 그 말을 듣고 시험에 들만한 사람이 있으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화가 치밀어도 상대방에게 또는 공동체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 아니면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고 싶어도
믿음의 형제와 이웃을 실망시키고 좌절시킬 것 같으면 마음속으로 삭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정에 있어서 자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셋째는, 3) 의지의 욕심을 죽이는 일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결단하고
결정합니다. 이것도 역시 욕심입니다. 이 욕심 때문에 세상에서 죄악이 해결되지 않고 투쟁과 싸움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마저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마저도,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찾아서 인생을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면 결국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혀서 죽게 될 것을 미리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멀리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유익을 위하여 결정하시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들 그리고 구원받아야 할 모든 인간들을
살리는 쪽으로 결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그 고난과 죽음의 결과가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보면, 주님이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베다니로 가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잘못하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염려할 때, 의심 많은
도마가 나서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도마처럼 “나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겠다”고 결단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부활은 이미 여러분 것입니다.
III. 결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였는데,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가 자살이라도 하였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의 죽음은, 자기 육신 속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욕심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위해 생각하고 자기를 위해 감정을 표현하고 자기를 위해 결정하던 태도를
버리고, 오히려 주님의 유익을 위하여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였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육신을 죽이는 일보다 더 어려운 순교의 길일지도
모릅니다.
장애자 시인 송명희 성도가 쓴 “쓴잔”이라는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의
쓴잔을 맛보지 않으면
주님의 쓴잔을 모르리
주님의 괴로움 당하지 않으면
주님의 고통을
모르리
주님의 십자가 져보지 않으면
주님의 죽으심 모르리
주님의 쓴잔은 내
것이며
주님의 괴로움 내 것이며
주님의 십자가 내 보물이라
또한 그의 부활 내
영광이리라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고 또한 동참하여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참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위하여 생각하고 느끼고 결단하는 욕심을 죽여버리고, 주님의 유익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거룩한 지식과 거룩한
감정과 거룩한 의지를 쌓아 가는 참된 그리스도인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