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10:25-37
(25)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I. 서론
한국에서 유명한 것들 중에 하나가 ‘총알택시’입니다.
너무 빨리 달린다고 해서 붙여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럽 여행을 해보니, 한국의 ‘총알택시’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시속
170km 정도로 운전하는데, 내 차를 추월하여 옆으로 휙 휙 지나가는 차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차들을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총알택시 운전사가 손님을 태우고 달려가고 있는데, 저 앞에 있는 교차로에서
트레일러를 끄는 트럭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운전사에게 손님이 소리쳤습니다. “운전사 아저씨! 속도를 줄이세요! 그렇지 않으면
부딪히겠습니다.” 그러나 운전사는 “손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차가 저 교차로에 도착할 때쯤에는 저 트럭이 다 지나간 후일 것입니다.” 택시
운전사는 보통 때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정확하게 판단하고 계산하였습니다. 운전사의 말대로, 택시가 교차로에 도착하였을 때 그 트럭은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운전사의 노련한 경험에 감탄하는 순간, 그들의 눈앞에 커다란 트레일러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 트럭은 두 개의
트레일러를 끌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은 대개 자기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하게 마련인데,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 경험과 지식이 최고이고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 총알택시 운전사가 겸손하였더라면 그러한 사고는 일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도
보면 그러한 착각과 망상 때문에 진리를 손으로 잡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어느 율법사입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아셨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거꾸로 질문하십니다. “너는 율법의 전문가인데, 그 율법에서는 무엇이라고 가르치느냐?” 그
율법사는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네가 대답을 아주 잘하였다. 그러니 네 대답대로 가서 행하여라. 그러면 네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율법사는 예수님이 말씀하는 뜻을 깨닫지 못하고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이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경우에는 그 이웃이 누구인지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쪽만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생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II. 본론
1. 율법사의 관심
- 누가 내 이웃입니까?
율법사가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누가 내 이웃인가?”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사와 같은 태도를 갖고 있는데, ‘이웃’이란 “나를 도와주는 자들” 또는 “나에게 유익이 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입니다. 그런 이웃이 있다면, 정말로 그들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의 현실을
그렇지 못합니다. 나에게 전혀 무관심하거나, 또는 내 것을 뺏어가려는 사람들뿐입니다. 거리의 불량배나 도둑놈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어떻게든지 내 것을 빼앗아 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이웃이 없는 것입니다. 이웃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란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사의 논리이고, 세상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세상을 등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겠다고 하는 극단적 종말론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직장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오직 자기만 경건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세시대에 지어놓은 교회들을 가보면 정말로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광객들은 모두 감탄하면서
사진을 찍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시대에 그러한 거대한 교회를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시민들이 희생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당시에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교황과 사제들은 왜 그러한 거대한 교회를 짖기 위해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시키고 물질과 노동을 착취하였을까요?
율법사의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이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율법사와 같이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한, 그에게는 사랑할 이웃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의 관심 - 강도
만난 자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누가 내 이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강도 만난 자인가?”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누가 나에게 유익을 주는 이웃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여행을 하다가 매우 곤경에 처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차를 빌려서 운전하고
가다가 한밤중에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가끔 나타나는 표지판을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갖고 간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캄캄한 길을 아무리 달려도 길을 물어볼 주유소 하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앞이 캄캄하다는 말 그대로였습니다. 이럴
때 누구든지 나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진정한 이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강도 만난 자란,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빼앗긴 자, 피해를 입고 스스로 회복이 불가능한 자, 그리고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내가 이웃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자에게는 내가 쉽게
이웃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그의 부족함을 조금만 채워주어도, 그의 어려움을 조금만 도와주어도, 그는 나를 이웃으로 받아줍니다.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강도 만났던 자를 생명의 길로 안내할 수 있습니다. 안심하고 따라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를 질문하는 자에게 “네가 강도 만난 자들에게 이웃이 되어주어라”라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여러분도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3. 이웃이 되는 세 가지 마음(자비를 베푸는 마음)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보면, 이웃이 되는 데에는 세 가지 마음이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둘째는 그에게
내 것을 내어주는 마음이며, 셋째는 내 것으로 대신 갚아주는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37절 말씀처럼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강도 만난 자’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강도 만난 자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빼앗긴 자, 피해를 입고 스스로 회복이 불가능한 자, 그리고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자”입니다. ‘강도 만난
자’가 아닌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면 오히려 더 빼앗으려고 달려듭니다. 이웃이 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원수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인가?”를 잘 분별하고 또한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푼 것은,
자기에게 돌아올 무슨 유익을 계산하여 한 것도 아니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억지로 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무의식중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런 마음을 달라고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III.
결론
인간은 모두 ‘강도 만난 자들’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강제로 빼앗겼고 스스로 회복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고 목숨까지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른 강도 만난 자들에게 예수님처럼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강도 만난 자들이
널려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님, 내 자녀들, 그들도 강도 만난 자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만나는 성도들도 다 강도
만난 자들입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를 질문하는 태도로부터 “내가 당신의 이웃입니다!”를 외치고 실천하는 태도로 바꿉시다.
그러는 여러분에게 주님이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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