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14, 2012

“바울의 선한 싸움” (8/22/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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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디모데후서 4:6~11
(6)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9)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이러한 성향을 ‘ego-centricity’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인간의 성격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네로/자라/덩굴/스타)
여기에 비추어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기 이전의 바울 사도는 네로 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네로 형을 한 마디로 설명한다면 불같이 쏟아내는 성격입니다. 장점은 태도가 분명하고 감정적인 뒤끝이 없다는 점이며, 단점은 상대방에게 적대감을 주기가 쉽고 감정적인 상처로 인하여 넘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바울 사도의 이러한 특징은 사도행전 9장 1-2절과 20-2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도행전 9:20-22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바울 사도의 이러한 성격 특성은 그가 다메섹으로부터 도망쳐 아라비아 광야에서 여러 해 동안 지낸 이후, 그리고 전도여행이 계속되던 때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사도행전 15장 35-41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사도행전 15:35-41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 6절과 11절에 의하면, 사역을 마감할 때에 이르자 그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화를 내면서 헤어졌던 마가를 다시 만나고자 디모데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마가와의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자신과 싸워 왔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 또는 세상에 대하여 ‘싸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싸움’이라는 말의 원어적 뜻에는 race 또는 struggle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그가 말하는 ‘선한 싸움’에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사움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싸움’이라 할 때 선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 뿐만 아니라,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유익한 경우를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에서 자신의 승리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 싸움의 결과가 가치 있고 유익하였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바울 사도처럼 ‘네로 형’에 속하는 성격을 갖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잘못된 자기중심적 성격과 싸우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성격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주님 앞에 가게 될 그 날에 바울 사도가 고백한 것과 같은 승리의 확신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I. 바울의 자기중심적 태도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마가와 헤어지게 된 것은 자기 욕심이나 자기 편의만을 위한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기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로 형’에 해당하는 자기중심적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를 믿음의 행동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자기 생각과 기준 대로 믿음의 형제들을 판단하고 책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여자 고등학교에 매일같이 지각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에게 매일 야단을 맞았고 급우들도 싫어하였습니다. 아무리 야단을 쳐도 말을 듣지 않자, 담임선생님이 그 학생의 부모님들에게 항의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학생의 아버지는 병으로 사망하였고, 나이 많은 할머니와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동생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도와주다가 매일 지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군사가 자기중심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면 자기 기준으로 남들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네로 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분노를 쉽게 폭발함으로써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기고 투쟁이 벌어지게 합니다.

II. 그러한 성격이었던 바울의 마음이 바뀌었고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용납하는 것이 좋을까요? 만약에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하여 억지로 사랑한다면 결코 옳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바울은 마가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이유로 ‘나의 일에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한 ‘나의 일’이란 바로 주님의 복음 사역이었습니다. ‘나에게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일에 유익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마가의 입장 고려하였다면, 그리고 하나님 마음 먼저 생각했다면 그렇게 화를 냄으로써 믿음의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함께 사역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하여 헤어져야만 하였더라도 계속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그리스도 중심적 인생관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III.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기 위한 세 가지 실천방안을 추천합니다.
첫째로 자기 자신을 분석하십시오. 어떤 형태의 ‘자기중심적 성향’에 해당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검토하십시오. 그가 어떤 성격인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고려하면서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선택하고 실행하십시오.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 도움이 될까? 예수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먼저 생각한다면 ‘자기중심적 태도’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인간의 성격은 다양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성격의 형태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은 ‘어떤 사람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바울이 변화되기 이전의 모습처럼 ‘네로 형’은 아닙니까? 자기 성격을 방어하거나 변명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 중심의 성격’으로 바꾸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워서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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