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18, 2012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창세기 8:20~9:7) [2007-7-22]



본문 : 창세기 8:20~9:7    7/22/2007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3)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5)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7)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일 세 가지를 계획하셨다. 성도, 예배, 진리가 그것이다.”라고 ‘토마스 굿윈’이라는 분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예배와 섬김의 봉사를 즐기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자기 자리는 없다.”는 말도 있듯이, 예배는 성도의 본분입니다. 성도들에게 예배는 늘 드려야만 하는 삶의 일부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도라면 누구나 다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쉬운 일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과연 얼마나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예배는 하나님과의 친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자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신자의 삶 전체가 곧 예배이다.(-제럴드 밴)"라는 말도 듣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예배야말로 가장 어려운 것들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참 예배를 드리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것일까요?
오늘 본문 20절에서 노아의 모습을 보면, “예배는 하나님께 '드림'이다”라고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의 드림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노아야말로 진정한 예배자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드린 노아가 그 결과로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까?
본문 1-3절에 보면 예배자가 받는 복을 세 가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번성하고 충만케 되는 복(increase and fill)이고, 둘째는 정복하게 되는 복(rule over)이며 셋째는 생육하는 복(fruitful)입니다. 여러분도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 이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노아가 예배에 성공하게 된 데에는 3가지 조건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1. 첫째는 “드려라”입니다.
“예배는 드림이며, 받음은 예배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 참여하는 이유가 “받자!”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은 이미 예배에 실파한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처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받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받지 못하면 시험드는 교인이 있습니다.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교회에 와서 “예배드렸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 즉 한국 교회의 초창기 성도들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 열매로 오늘날 민족과 나라가 부강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넣은 기념교회를 크게 짓고 싶어하던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아무에게도 건축헌금을 못하게 엄격히 명령하였습니다. 그래야 후대에 이 거대한 교회는 자기 혼자 지은 교회로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건축이 완성되었습니다. 물론 머릿돌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더니 자기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한 가난한 과부의 이름을 새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꿈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왕은 하도 이상하여 꿈에서 깨어 그 이름대로 과부를 찾았습니다. 왕은 그 가난한 과부에게 교회를 지을 때에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호통을 치며 물었습니다. 그 과부는 벌벌 떨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왕이시여! 나는 아무 일도 한 일이 없습니다. 왕께서 헌금을 못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헌금을 하겠습니까? 교회 건축 현장에는 접근도 못하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헌금을 하겠습니까? 다만 너무나 교회건축에 동참하고 싶어서 벽돌을 나르는 말들에게 건초 먹이를 주었을 뿐입니다."
왕은 건축자를 시켜서 그 교회의 머릿돌에서 자기 이름을 긁어내고 이 과부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몸부림치는 사람을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은 어떤 마음입니까? 드리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받기 위해서입니까?

2. 둘째는, “정결한 것으로”입니다.
무엇을 드리더라도 더러운 것으로, 정결함에 관심 없이 드린다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가인은 곡식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는데,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제물의 종류 때문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마음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정결한 예물 즉 최고의 정성과 노력으로 마련한 물질과 시간과 헌신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회개의 첫걸음이 되게 합니다.

3.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위하여”입니다.
20절에서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완전한 복종과 사랑을 드리는 마음과 행동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만약에 나 자신을 위하여, 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예물이나 마음 또는 시간을 드린다면, 심지어 생명을 드린다 하더라도 그의 예배의 중심에 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나’를 버려야 진정한 ‘주님’앞에 드리는 참 예배가 될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드(William Booth) 대장이 죽기 수개월 전 한 사람이 그를 방문하여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주님의 종으로서 변함없이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부드는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마음대로 써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나온 인생이 최악의 선택이었고, 참담한 실패였고, 후회스런 인생이었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예배에 성공한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어느 예배자의 기도문입니다: “오 주님! 제가 만일 지옥이 무서워 당신께 예배한다면 저를 그 속에 태우셔도 좋습니다. 만일 제가 낙원의 욕심 때문에 당신께 예배한다면 저를 그곳에서 제외시키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오직 당신만을 바라며 예배한다면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에서 저를 쫓아내지 마옵소서.”
예배에 성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하고, 정결한 것으로 드리며, 더욱이 여호와를 위하여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받아야 할 것을 그리고 받고 싶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공적인 그리고 복 받는 예배자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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