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이사야 43:1~7
(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눈이 나쁘면 안경을 써야 합니다. 안경을 쓰는 목적은 사물을 더 잘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안경의 유리에 색깔을 입히면, 온 세상이 그 색깔로 변형되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안경을 쓰고 잠자는 친구를 놀려주기 위하여 안경 유리에 검은 구두약을 발라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침에 해가 떴는데도 캄캄한 밤인 줄 알고 늦잠을 자다가 선생님에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색깔 있는 안경을 끼면 세상이 그렇게 왜곡되어 보이듯이, 마음의 안경도 색깔 있는 안경을 쓰면 생각과 감정이 그렇게 왜곡되어 보이게 마련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의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아름답고 살아볼만한 세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의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지긋지긋하고 살아볼만한 가치가 없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안경을 쓰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I. 세상의 안경으로 바라보면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세상은 ‘상대적 가치를 평가’라는 안경을 쓰고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진 사람 또는 그보다 조금 더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면 상대적인 부족함과 위축감을 느끼고 비굴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딜레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괴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리하여 소망이 없는 가운데에서 살아가니, 그 인생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롭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서로 그 함정에 빠지게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서로 ‘기를 죽이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이웃에게 낙심되는 말을 합니다. 친구간에 서로 헐뜯어가면서 상처를 줍니다. 사랑함으로 만난 부부간에도 상대방의 기를 꺾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녀로 하여금 좌절하도록 하는 말을 합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크게 상처를 입히는 말은 ‘너는 도대체 잘하는 게 무어냐?’라고 하는 설문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심지어 믿는 자들까지도 이러한 습성에 젖어있고 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악한 안경을 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II. 그러나 하나님의 안경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1절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지명하여 불렀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무렇게나, 우연히, 또는 실수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명하여’ 즉 ‘그들의 이름으로’ 부르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과거를 확실하게 아신다는 것이고, 그들의 현재 가치를 분명하게 인정하신다는 것이며, 그들의 미래에 대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인하여 특별한 경우에 특정인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사람만 특별히 부르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애 이후, 부활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후의 신약시대에는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이 모든사람들에게 임재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차별 없이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무슨 특별한 부르심이 아닌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절의 ‘지명하여 불렀나니’라는 말씀은 개개인을 독특하게 창조하고 조성하신 하나님이 그 각각의 이름으로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을 특별히 부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나에게 특별한 가치 있다는 것이며, 나에 대한 특별한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며, 내가 유일하고도 독특한 대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1절과 5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시고, 2절부터 7절까지 여러 가지 명령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 중 하나인, 그 유명한 ‘모나리자 상’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고아라는 이유로 주위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고 아주 소극적인 성격이어서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를 키운 할머니는 다빈치가 집을 나설 때마다 그의 귀에 대고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할머니는 너를 믿는다.’고 속삭여 주었다고 합니다. 다빈치가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소망을 주시고 기를 살려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 보면,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에게 떼를 쓰던 가나안의 이방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것도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경으로 보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참된 의미와 가치를 찾고 진정한 목적을 위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III.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진리를 우리의 의식 속에 분명하게 인식(awareness)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인식을 토대로 하여 나 자신에 대한 가치를 재평가(re-valuation)해야만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만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 자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해 드리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이루리라!’고 날마다 고백하는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와 왕비를 처형한 시민들이 어린 왕자까지 죽이자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왕자를 죽이는 것보다는 빈민굴에 살면서 더럽고 추한 말과 행동을 배우게 하여 저주받게 합시다’라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왕자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면서,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어요. 나는 왕자입니다.’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왕자’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하나님의 왕자’입니다. 왕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이제는 종이 아니라 내 친구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님의 친구답게 당당하게 살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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