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7:15~23 12/26/2004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2004년을 결산할 연말이 되었습니다. 결산을 제대로 하려면 손익계산서를 만들어 보아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것들과 비교할 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더 크면 흑자가 될 것이고, 그 반대이면 적자가 되겠지요.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그 날에 인생을 결산하는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이것도 행하였다 저것도 행하였다 하면서 큰소리 쳤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매우 가혹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함들을 주님께 자랑하고 있는데, 이는 행위(doing) 즉 나타난 결과에 의해 자신들을 평가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전혀 달랐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말씀은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실존(being) 즉 행위의 근원에 의해 평가하는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여기서 실존(being)이라 함은 그 사람의 마음 또는 중심을 뜻합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그 사람의 됨됨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많이 행하고도 속사람이 변화되지 못하면, 즉 주님 안에서 새 피조물 되어가지 않으면, 주님이 그를 모르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투자는 많이 해놓고 결국에는 쫄딱 망한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망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겠지요.
어떤 교인이 술에 취한 채로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답니다. 목사님이 ‘천국’에 대한 설교를 하다가, ‘천국가고 싶은 사람 일어서시오’라고 하였더니, 모두 일어섰는데, 그 사람은 혼자 앉아서 졸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목사님이 모두 자리에 앉게 한 후에 이번에는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 일어서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큰 소리에 깜짝 놀라서 일어섰다가 ‘목사님과 나만 서 있군요’라고 말하더랍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한 분도 실패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본문 말씀을 토대로 Check List를 만들어 보았는데, 2004년을 돌아보며 반성할 때, 그리고 2005년을 새로 계획하며 시작할 때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첫째로, 행위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23절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평가하셨는데, 불법이란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사람의 방법으로 행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자선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그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매우 거룩하고 신앙적인 것 같았지만, 그 근원은 악하고 위선적인 마음이었습니다.
<마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소수의 악한 지도자들의 선동에 쉽게 휩쓸리는 군중도 문제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면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였지만, 그들의 외침은 무의미한 고백에 불과하였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거룩하고 선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아는 사람’은 그가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선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람입니다.
2. 둘째로, 행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2절에 보면 그들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라고 말하고 있는데,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랑을 위해서 행한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선지자노릇, 귀신 쫓아내기, 그리고 많은 권능 등,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큰 일들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은 그러한 큰 일들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맡겨주신 작은 일에 충성하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일들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을 영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였습니다. 주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마리아에 대한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눅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자기 자랑을 위하여 또는 자기 만족을 위하여 억지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아는 사람’은 직 주님께 영광 돌리도록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3. 셋째로 실존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그 열매가 열리는 나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나무라도 잎만 무성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가 열리더라도 그 나무에 열려야 할 열매가 맺힐 때 나무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에는, 연보 궤에 헌금을 많이 넣은 부자와 겨우 두 렙돈을 넣은 과부에 대해 주님이 평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금액으로 보면 부자가 훨씬 더 많이 헌금하였지만, 정성과 신실함에 있어서는 과부의 마음이 훨씬 더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은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요란하게 떠들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주님은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아는 사람’이란 좋은 나무로서 아름다운 열매를 분명하게 맺히는 것처럼, 선한 마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는 ‘얼마나 큰 일을 많이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주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큰 일들을 많이 행하였으나 ‘주님이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일들을 적게 행하였더라도 ‘주님이 아는 사람’이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혹시 2004년도에 실패하였다면, 이제 다가오는 2005년에는 성공하는 성도들이 되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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