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10:25~37 9/5/2004 (25)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전문가인 그가 율법의 내용을 가지고 직접 대답하게 하신 후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라고 결론을 내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두 가지 사랑에 영생 얻는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를 통해서 보면, 이웃에 대한 태도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이웃을 찾는 사람'입니다. 율법사가 보여준 태도입니다. 자기에게 이웃이 되어줄 만한 사람을 찾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자기중심적 태도를 가지고 살펴보면 자신에게 이웃이 되어줄만한 사람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 이웃이 되어주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태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웃으로 필요로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25절에서 율법사가 질문하였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37절 말씀처럼, 나가서 그렇게 행함으로써 그 상대방에게 이웃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지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이웃이 되어줄 줄 때 영생을 얻게 됩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마리아인은 율법에서 영생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이웃 사랑'의 모델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에게는 크게 세 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I. 첫째는, 33절 말씀에서 보듯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상대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바쁩니다.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남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습니다. 그리하여 삭막한 마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거나 잘못을 범하는 것을 보면 쉽게 비난을 퍼붓고, 조금만 실수하여도 용납하지 못하고 꾸지람을 퍼붓습니다. 어떤 부인이 입원해 있는 친구를 병문안하였습니다.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몸이 구부러져서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습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너무나 바빴기 때문에 그리고 귀찮게 이것저것 부탁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못 본 척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때 뒤에서 그 할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한참 망설이다가 할머니에게 다가가 물어보았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러자 할머니는 '떨어진 벼개 좀 집어주시오'라고 부탁하면서, '당신이 내가 부탁한 사람들 중에 여섯 번째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빠서 남들을 불쌍히 여길 여유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에게도 이웃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나 자신부터 불쌍히 여기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학대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은 이웃을 불쌍히 여길 수 없습니다. II. 둘째는, 34절 말씀에서 보듯이 돌보아 주는 마음입니다. 돌보아주는 마음이란,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고 그의 상처를 싸매어 주는 마음입니다.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입으로만 위로하거나,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거나, 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도와준다면,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유명한 학자인 이규태 씨가 저술한 '입술의 한국학'이라는 책에서 보면, 'I love you'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정도가 말만으로 할 때에는 7%, 억양이나 음색을 통해서는 38%, 표정과 몸짓을 통해서 55%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에 진심으로 동참할 때 그에게 진실된 마음이 전해지고 참된 이웃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폴레옹 장군이 구라파 일대를 점령한 후에 적군을 감시하도록 보초를 세우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한밤중에 직접 순찰을 나갔는데, 잠을 자고 있는 보초를 발견하고는, 그의 총을 살그머니 빼어 들어서 밤새도록 대신 보초를 서 주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든 병사들이 목숨을 바쳐서 나폴레옹에게 충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가까운 사람부터 돌보아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 자신의 어려움부터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 중에, 교우들 중에, 또는 불신자들 중에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III. 셋째는, 35절 말씀에서 보듯이 더 갚아주는 마음입니다. 더 갚아주는 마음이란 내가 가진 소유물로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쁘게 희생하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음입니다. 남들로 인하여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을 싫어하거나, 대가를 바라고 베푸는 사람은 결코 그들에게 이웃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섭섭한 마음이 들어서 결국에는 그 관계 사이에 벽이 생기고 틈이 벌어져서, 이웃이 되기보다 오히려 원수 관계가 되기가 쉽습니다. 그들을 돌보고 나서도 좋은 소리를 듣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악평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 날 눈보라 속에서 개와 함께 길을 가다가 조난당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비상식량을 꺼내어 개에게 먹였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열을 발산하는 개를 껴안고 추위를 이겨냄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상식량을 자기가 먹어버린 사람은 개가 굶어서 죽자 자신도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한다면,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베풀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아직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가족들과 교우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불신자들까지라도 그들에게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이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마음을 가졌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영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까운 이웃부터 먼 이웃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부터 사랑하기를 배우십시오. 남편과 아내에게, 부모님들과 자녀들에게, 교우들에게, 그리고 불신자들에게까지도 이웃이 되어줄 때, 그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성취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
Wednesday, March 14, 2012
이웃이 되어줄 때 - [200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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