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3, 2012

“잘 살아보세” (1/11/2004)



본문 : 잠언 3:1~10
(1)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2)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3)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4)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 (8)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9)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잘 사는 것, 모든 사람들의 최고 소원이지요. 그러면, 무엇이 잘 사는 것입니까?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전쟁이 없는 평화를 이룩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부자 나라인 이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 국민들이 가장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할텐데, 우울증이라는 정신병이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미국과 유럽이랍니다. 미개하고 못사는 나라에는 우울증이라는 정신병이 거의 없습니다.
무엇을 새로 소유하거나 성취하게 되었을 때 만족감을 누리는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자나 지식인보다도 가난한자나 배우지 못한 자의 행복지수가 훨씬 크다는 사실로 볼 때에도, 잘 사는 데 있어서 물질의 풍요나 환경의 안락함이 충분한 조건이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잘 살아보려고 열심히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이 잠언은 ‘잘 사는 길을 보여주는 책’이 됩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잘 살아보려는 사람들 중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잘 살아보기 위하여 지식에 의존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지식은 습득하고 잘 보관함으로써 생깁니다. 세상은 그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르고, 그 반대되는 사람을 무식한 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결국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지닐 뿐입니다. 1,000년 전에 습득한 지식으로는 오늘날의 시대를 살아갈 수 없으며, 저 아프리카 밀림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이 미국의 삶 속에 적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잘 살아보기 위하여 지혜에 의존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지혜는 경험과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그러한 사람을 지혜자리고 부르며, 지혜가 없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 지혜는 지식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더 영구적입니다. 3,000년 전의 솔로몬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똑같이 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경험으로부터 나온 지혜는 오히려 사람을 해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짧은 인생을 통해 과언 지혜를 얼마나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부류는, 잘 살아보기 위하여 진리에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는 오직 계시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계시’라는 말은 숨겨져 있던 진리를 마치 보자기를 벗기듯이 드러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를 귀하게 여기고 추구하는 사람은 ‘진리로 사는 자’이고, 그랗지 않은 사람들은 ‘허상을 좇는 자’입니다. 진리는 영원한 가치를 지니며,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영원한 참된 지식과 참된 지혜를 포함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 부류 중에 어디에 속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진리로 사는 자’란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본문 5절 말씀 처럼, 진리로 사는 자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으면 자기 명철을 의뢰하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은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전심으로”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할 때 ‘마음을 다하여’ 의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외줄 타기’로 유명한 어떤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질러 줄을 매놓고, 그 줄 위를 걸어서 폭포를 건너간다고 광고하였습니다. 구경꾼들이 구름떼처럼 모였습니다. 그가 소리칩니다. ‘여러분, 내가 이 줄을 타고 무사히 건널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모두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과연 그 사람은 아무 문제없이 줄을 타고 폭포를 건넜습니다. 그가 또 소리칩니다. ‘여러분, 내가 한 사람을 등에 업고도 무사히 건널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이번에도 ‘믿습니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내밀자 다 도망가 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한다고 할 때, 적당히 의뢰하는 자는 많으나, 마음을 다하여 전폭적으로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이것저것 요구는 많은데, 하나님께서 헌신하기를 요청하시면 요령을 부려서 빠져나가려고 하고, 변명하며, 심지어는 눈속임으로 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태도를 보이시겠습니까?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려고 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완전한 진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전심으로 의뢰할 유일한 대상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본문 7절 말씀처럼, 진리로 사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악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아내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세워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자녀들에게 심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딸이 시집을 갈 때 아버지들이 이런 교훈을 반드시 들려준다고 합니다: ‘네가 네 남편을 하인으로 대하면 네 남편은 너를 노예로 삼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네 남편을 왕으로 대한다면 네 남편은 너를 왕비처럼 떠받들 것이다’
눈에 보이는 권세는 일시적인 것을 결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이 능력의 근원이시요 영원한 것을 결정하는 유일한 분이심을, 그리고 그 분만이 유일한 두려움의 대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본문 9절 말씀처럼, ‘처음 익은 열매로 공경하는자’가 진리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사람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옛 어머니들은 웃어른에게 좋은 것으로 먼저 드리는 것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에게 공경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요즈음에는 물질만능과 이기주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좋은 것을 먼저 자기가 먹거나, 자식에게 먼저 주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 또는 자기 자녀가 우상이 되는 것이고, 그 자녀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곧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영원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공경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영원하고도 완전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고, 최고의 공경을 드려야 할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진리로 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 2,4,6,8,10절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질 영원한 약속입니다. 그러니, 진리로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로 ‘잘 사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진리로 사는 성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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