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천사원 아이들 곁에서 죽겠습니다” | ||||||||||||||||||||||||
1천2백여 ‘천사’들의 아버지 은평천사원 조규환 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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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휴전된 직후 서울거리에는 고아와 거지들로 가득했다.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빵 한쪽이 아쉬워 온종일 거리를 배회 했고, 버려진 아이들은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생이 전쟁이었고 동정심은
사치에 지나지 않았던 그 시절, 서울 은평구 구산동 언덕배기에 작은 ‘씨앗’ 하나가 움텄다.
넉넉함은 아닐지라도 사랑과 위로의 ‘온정’으로 헐벗고 소외된 자들의 둥지가 되어 준 자리, 바로 은평천사원이다. 버려진 이들의 ‘가족’이기를 50여 년, 은평천사원의 역사 속에 청춘과 열정을 기꺼이 묻은 조규환 원장(은평교회 장로, 75세)은 1천2백여 어린이들의 든든한 아버지이자 선생님이고 또 친구이다. 반세기 동안 천사원과 호흡하며 어린 아이들을 보듬어 온 조규환 원장을 이달의 웨슬리안으로 선정한다. 사회복지 '문외환'이 '후계자'로
당시 은평천사원의 실무를 맡았던 아펜젤러 부인의 눈에 들어 후계자로 지목 된 후 그대로 ‘천사원지기’로 자리를 굳혀 오늘에 달했다. 혈기와 청춘을 대신한 연륜과 깊이가 조 장로의 지난날을 말해주지만, 처음 천사원을 찾았을 때와 오늘의 열정은 다를 것이 없다. “한국전쟁, 월남전쟁 등 누구나 그랬겠지만 당시 참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피난 다니느라 한참 공부해야 할 때를 놓쳐버렸죠. 항상 아쉬움을 갖고 있던 때에 나보다 더 못 배운, 더 못한 상황에 처한 어린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은평천사원에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열심히 공부하려 노력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들을 섬기고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조규환 장로는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중 삶의 가장 기본적인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어린 아이들의 ‘고달픔’을 직접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사역’이 바로 이 곳임을 확인하게 됐다고 조 장로는 고백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뜻인지, 주위의 권유인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도 모른 채 ‘순리’처럼 은평천사원에 둥지를 틀었다. 은평천사원 살찌운 살림실력 어려운 살림과 부족한 인력난은 복지원 ‘초년생’ 조 장로가 감당키 어려운 숙제였다. 천사원 운영에 큰 벽에 부딛친 조 장로는 자원봉사자를 모집,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 인력풀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국내 대기업과 국제회의와 모임 등에 참석해 은평천사원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의 손길을 요청, 든든한 후원자들을 하나 둘 만들어 갔다. 이들은 천사원이 진행하는 사역의 동역자로서 투명하고 건강하게 운영되도록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 조 장로는 천사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에게 최상의 교육과 사랑을 쏟아 부었다. 아펜젤러 부인이 언제가 그에게 했던 “천사원을 위해 돈을 벌고 싶다면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켜라”는 말을 반신반의한 심정으로 시행해 나간 것.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아이들 곁에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부모처럼 보살피고 아꼈다. ‘진짜’ 부모라는 심정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그의 진심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진 걸까. 변호사, 교수, 의사, 박사 등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는 일꾼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이제 천사원과 조 장로에게 받았던 사랑을 다시금 되돌려 주고 있다. 천사원 운영을 위해 그들이 기꺼이 내어놓은 ‘손길’에 조 장로는 “아~ 아펜젤러 부인이 했던 말씀이 바로 이거 였구나”를 절감하게 됐다고. ‘사랑·정직·최선’ 죽을 힘 다해 지켜 위험과 갈등에 노출되기 마련인 천사원. 결코 녹록치 않은 ‘원장’ 자리를 지켜오며 조 장로가 목숨처럼 지켜온 3가지 지침이 있다. 첫째는 아펜젤러 부인이 몸소 보여준 ‘사랑’이고 둘째는 윤성렬 목사님이 평생을 두고 실천하신 ‘정직과 믿음’ 그리고 셋째는 사회복지를 전문가인 이스라엘 교수가 당부한 ‘최선’이란 3가지 방침이다. 조 장로는 이 3가지 사항을 놓치지 않으려 순간순간마다 기도로 자신을 중무장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예수님의 뒤를 좆는 사역이며 크리스찬의 마땅한 의무라는 ‘본질’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그도 천사원에서의 ‘일탈’을 꿈꿨던 때가 있다. 원아들은 도대체 말을 듣지 않고, 천사원 운영은 재정에 허덕이기를 거듭하던 1970년대. 천사원과 원아들을 후배에게 맡기고 미국으로의 이민행을 준비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무렵. 알 수 없는 두통이 시작됐다. 병원에 가도, 약을 먹어도 두통은 낳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민이고 뭐고 그냥 한국에서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거짓말처럼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고. 그제서야 하나님의 뜻을 다시금 깨달은 조 장로는 “이제는 죽어도 천사원에서 죽고 살아도 아이들과 함께 살겠다”는 일사각오를 세우게 됐단다. 75세의 고령에도 천사원 시설 하나 하나를 점검하며, 아이들이 표정을 관심있게 살피는 것은 조 장로의 이같은 다짐이 담긴 생활철학인 셈이다. 건강한 신앙을 밑천 삼아 조 장로는 지난해까지 감리회 장로 1호였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섬기는 교회에 헌신한 덕에 1968년 장로 피택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은퇴하기까지 그는 한국 감리교회의 첫 번째 장로였던 것. 조규환 장로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목사님의 말씀에 “NO”를 해 본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목사님을 섬기고 교회에 헌신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항상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조 장로는 은평교회가 3차례 재건축을 하는 동안 건축위원장을 맡아 시간과 열정을 드렸고, 실제로 그의 집과 땅과 퇴직금을 헌금하기도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큰 복지원의 원장으로 40여 년을 지내고 있으니 어느 정도 재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조 장로는 고개를 흔든다. 물질에 욕심이 없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고, 그런 그에게 맡겨주신 은평천사원은 천직인 것 같다며 그는 웃는다. 조규환 장로의 이같은 신앙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 그는 어머니를 ‘기도대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가세가 기울자 아버지는 병을 얻고 몸져 누우셨다. 자녀들의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는 매일 20키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다니는 보쌈 장사를 하셨다. 매일 반복되는 삶의 무게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아들은 어머니가 걸으셨던 길을 생각하며 못 다한 효도를 못내 아쉬워한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어머니는 기도를 쉬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우리를 신앙으로 기르시려 부단히도 애쓰셨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신앙을 주위사람들은 손가락질 했지만 어머니는 꿋꿋이 신앙을 지키셨지요.”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은 조규환 장로 역시 그의 4자녀에게 하나님을 심어주는 교육을 우선했다. 어느덧 장년으로 성장한 자녀들도 이제는 사회와 교회에서 한 ‘몫’을 하는 신앙인으로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늘진 곳에 그리스도의 '햇빛'을 1959년 당시 75세였던 윤성렬 목사의 “전쟁 고아를 도와주자”는 결심과 함께 아펜젤러 부인과 잭타이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은평천사원은 문을 열었다. 1961년 재단법인으로 설립 허가를 받은 후 탄탄한 공동체로 발돋움하게 됐으며 지금까지 1천2백여 명의 아동들이 이 보금자리에서 건강하게 성장해 왔다. 은평천사원은 어린이 외에도 장애인, 노인, 여성 복지에도 ‘선구자’적 행보를 걸어왔다. 1962년 육아시설 설립인가를 받았고, 1981년에는 정신지체아동 특수학교인 ‘은평대영학교’를 개원했다. 아무도 장애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던 산업화 시대, 천사원은 오히려 그들의 지지하고 지원하기 위한 시작을 알렸다. 정신지체아 재활시설 ‘은평재활원’, 장애인공동생활가정 ‘제베바소망의집’, 한국장애인복지연구소 개소에 이어 은평점자도서실 위탁운영, 은평천사원 출판부 등록 등 장애인 교육에 앞장서왔다.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서울재활병원, 은평장애인작업활동장, 서부재활체육센터 등을 개원한 것은 전인적인 장애인 재활을 돕기 위한 노력의 일환. 또한 서울특별시립 노숙인 쉼터 위탁 운동, 출소자 지원, 미혼모와 자녀 지원 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늘진 곳에 비추고 있다. 이 뿐 아니라 조규환 장로는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도 열심을 냈다. 장애인을 위한 선교회인 참빛교회를 창립한 이후 실로암교회, 녹번교회, 월릉교회, 동산리교회 등 5곳의 교회를 개척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면 꼭 누군가 그 일을 도와주더군요. 이상하리만큼 정확하고 또 빈틈이 없는 하나님의 이치입니다.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오늘의 은평천사원이 있고, 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규환 장로는 천사원을 방문하는 사람에게 늘 한 장의 편지를 건넨다. “행복을 담아 전해주세요”라는 이름의 후원신청서다. 불우한 환경에 있는 이웃을 돕는 것은 비단 나 혼자의 일이 아니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정성과 관심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곳, 은평 천사원. 하나님 다음으로 천사원을 사랑하는 조규환 장로가 있는 그곳은 천사들이 잠시 쉬어가는 천국의 모습이 아닐까. |
Friday, March 9, 2012
“죽어도 천사원 아이들 곁에서 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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