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15, 2012

천국사다리(33) -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10/23/2005)



본문 : 마태복음 15:21~28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사람마다 태어나는 환경이 다릅니다. 어떤 아이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라는 반면 어떤 아이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입을 것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불공평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환경적 요인 때문에 문제인가요?
2005년 8월 19일에 해외입양인연대(GOAL)에서 주최하는 컨퍼런스가 ‘두 남자의 삶 이야기’라는 주제로 한국에서 있었습니다. 그 두 남자의 주인공 중 하나는 김홍일(40세)이라는 사람인데, 8살에 보육원으로 들어갔다가 계속 그 보육원에서 자라났습니다.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교육도 변변히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해외에 입양되어 가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되었다면 훨씬 더 나은 인생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또 하나의 주인공은 박현민(37)이라는 사람인데, 그도 역시 보육원에서 자라다가 11살이 되었을 때 미국으로 입양되었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교육도 많이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인종차별 등 남들이 알지 못하는 큰 아픔들이 그의 삶 속에 늘 함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한 가지 소원은, 어른이 되면 즉시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과 똑같은 피부색과 얼굴 모양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사는 것이었다고 고백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고 합니다. 과연 모든 문제가 환경의 차이 때문에 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공생애를 주로 이스라엘 지방에서 보내셨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이방인의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을 방문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경멸하였습니다. 그들의 땅은 절대로 밟지 않으려 하였고 이방인들과는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가나안 여인은 유대인들로부터 가장 경멸을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 중에 태어나셨던 주님도 그렇게 땅을 차별하고 사람을 차별하셨나요?
본문 26절에 의하면, 주님께서 그 땅과 사람들을 모욕적으로 차별하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을 ‘개’에게 비유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당시 문화에 있어서도 가장 치욕적인 언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7절에 보니, 가나안 여인은 의외의 반응을 보입니다. 자신을 ‘개’에게 비유하면서 은혜 베풀기를 거절하시는 주님 앞을 떠나지 않고 계속 간청합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주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1.‘이스라엘 집 자손이 누리는 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주님 앞에 나아와 간청할 때(22절) 주님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23절) 여인이 너무나 소리치며 따라오는 것이 귀찮아진 제자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 여인을 보내라’고 주님께 간청합니다. 그때에서야 주님이 반응을 하시는데,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24절)’고 하면서 여인의 간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주님의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집’을 강조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또는 유대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반면에, 이방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인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십자가에 달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반면에 가나안여인은 주님께 자비를 요청하고 강청하기까지 하였으며 결국에는 응답을 받았고 주님의 큰 칭찬을 듣기까지 하였습니다.
주님의 복을 받을 자격을 이미 은혜로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녀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값없이 받으면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을 무슨 대단한 사람으로 오해하고 교만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하였고, 굴러온 복을 차버렸습니다.
부모님에 의해, 친구에 의해 , 배우자를 따라서, 또는 자녀들의 전도에 의해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게는 되었으나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생활로 바뀌지 않으면, 이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주님을 오히려 배척하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그러면, 가나안 여인이 누릴 복은 없는 것인가요?
본문에서 ‘가나안 여인’은 복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기드 모파상의 작품 중에 ‘비계 덩어리(Boule de Suif)’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프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마차를 타고 도망치는데, 그 마차 안에는 그 나라의 고위층 남자들이 타고 있었고, 매우 뚱뚱한 한 여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나라를 위하여 남몰래 싸우다가 피신하는 길이었고, 남자들은 자신의 편안한 삶을 위해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이 여인을 우습게 여기고 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국경지역을 넘지 못하고 여관에서 여러 날 숨어 있었는데, 남자들은 이 여인에게 러시아 장교와 잠자리를 같이 함으로써 자신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여인은 결국 그들의 요청대로 해줍니다. 자, 여러분 생각에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 누구에게 더 가치를 부여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간청하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가을에 논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줍기 전에는 그 이삭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운 후에는 추수한 알곡과 동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받은 모든 자녀가 동일합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집의 자녀와 이 가나안 여인 중 어느 쪽입니까?

3. 주님께 가까이 가는 비결은‘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외치면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헬라어 원문에 보면,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이 ‘eleieson'이라는 단어인데, ‘자비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 최고로 낮아진 자세로 외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성립되려면 3가지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나의 주인인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면, 세상의 궨세 또는 세상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 주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둘째, ‘나는 주님 앞에 불쌍한 자인가?’ 나의 영과 혼과 육이 주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고자 하는 태도는 교만한 것입니다.
셋째, ‘나는 얼마나 간절하게 요청하는가?’ 가나안 여인처럼 끈질기게 인내함으로 간청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또는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사다리 올라간다는 것은 주님의 복을 계속 받아 누리는 체험의 삶 그 자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십시다! 주님 앞에 불쌍한 자들이 됩시다! 응답을 받기까지 인내하며 간청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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