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17, 2012

“이삭의 푯대" (창세기 22:1~14) [2007-4-22]



본문 : 창세기 22:1~14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하고 (6)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12)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자신의 삶을 이끌어주는 푯대를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푯대를 가진 사람은 어떤 고난이나 시련이 와도 잘 극복할 수 있고 오히려 더 성숙되어갈 수 있는 반면, 푯대가 없는 사람은 방황과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한국과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에 태어난 사람들, 인구 17%)의 노후대책에 대한 의식을 비교분석한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조선일보 2007.01.24) 한국 사람들은 노후 대책을 위해 정부를 믿기보다는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에 의지하고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반면 늙고 병들어도 자식에게 기대려는 마음은 없고 "오직 ‘나’만 믿는다"는 경향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일본은 퇴직 후의 생활을 "국가가 책임져 줄 것이다"라는 의식이 한국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민족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현상들 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독일도 비슷한 성향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국가를 개인적 삶의 푯대로 삼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국가를 중심으로 뭉치는 힘이 크고 한 나라로서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국가가 정하는 방향에 모든 국민이 휩쓸리기 쉽고, 개인적인 삶의 의미나 목적이 무시되거나 상실되기 쉽습니다.
반면에 한국인은 개인을 자기 인생의 푯대로 삼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나라를 중심으로 뭉치는 힘이 작은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당하는 시련이 많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어떤 문제 앞에서 잘못된 정책을 펴거나 국가적으로 퇴보하는 일이 생겨도 개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힘은 여전히 강합니다. 오직 온 국민이 푯대로 삼을만한 어떤 개인 모델 없는 것이 오늘날 한국인이 당면한 큰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분명한 푯대를 갖고 그것을 따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이삭은 무엇을 푯대로 삼고 따라갔는지, 그로부터 교훈을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1.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모든 자녀들은 연약한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반드시 부모의 양육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어느 정도 닮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내아이의 경우에는 자라면서 자기 아버지를 성장의 모델로 삼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이삭을 보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닮은꼴이었던 것을 발견합니다. 심지어는 창세기 26장에 기록된 것처럼, 자기 아내를 팔아버릴뻔한 것까지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삭에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창세기 26:23-24) 그리고 100배의 복을 받습니다. 그 복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 결과로 얻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이삭은 복종한 결과로 '여호와이레'를 분명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하여, 그의 인생의 푯대는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이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야곱에게 전해주는 전달자가 되었고 평탄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2. 이삭의 부모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니었다면...
만약에 이삭에게 신앙의 부모가 없었다면, 그래도 하나님의 복의 전달자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평강이 그의 삶 속에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한 신앙의 아버지를 둔 자녀가 되는 일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 육신의 아버지에게 순종만 잘 하면 하나님의 복을 넘치게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삭이 받았던 복을 받고 또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부모가 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이삭처럼 참 신앙의 아버지를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푯대로 삼고 그를 닮아가시기 바랍니다.

3. 문제는 "나에게 신앙의 아버지가 있는가?"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도 예수님이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땅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늘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의인"이었습니다.(마태복음1:18-19 ) 어렸을 때에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순종하셨겠지만, 공생애를 사실 때에는 오직 하늘 아버지께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땅의 아버지'에게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직분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러한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여 원망스럽습니까? 그러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원망하거나 포기합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늘 아버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완전하고도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그 아버지의 영원한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완악한 인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예수를 영접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의 아버지'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그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디모데전서 1:1-2, 디머데후서 1:1-2) 디모데는 신앙의 아버지인 바울 사도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를 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역할을 통하여 디모데는 큰 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그리고 누려야만 할 하나님의 복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푯대 즉 '아버지'를 발견하였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분은 신앙의 후진들에게 어떤 푯대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하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의 삶의 푯대로 삼읍시다! 그리고 '신앙의 아버지'를 발견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리고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는 교우들과 저 세상 사람들에게 멋진 '신앙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삭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고 전달해주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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