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15, 2011

한글 보급이 아니라 한글 나눔이다

한글 보급이 아니라 한글 나눔이다
  • 김주원 서울대 교수 훈민정음학회 회장
  • 입력 : 2009.08.18 23:00

 김주원 서울대 교수 훈민정음학회 회장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이 그들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로 한글을 채택하고, 초등학교에서 한글로 표기된 교과서로 찌아찌아어 교육을 시작하였다는 뉴스는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것 같다.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까지 적을 수 있는 글자라고 자랑해 마지않던 한글이 우리의 민족어를 표기하던 한계를 벗어나서 글자가 없는 다른 민족의 언어를 표기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럴 법도 하다.

한글은 로마자에 비교하면, 개성이 너무 강한 글자이다. 소리글자이면서도 낱 글자를 모아서 사각형 속에 담은 것이나 형태소 표기를 하여 뜻글자처럼 기능할 수 있게 된 것 등이 어떤 다른 글자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너무나 한국적인 것이며 한민족의 상징물의 하나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이다. 이런 사실은 이 글자가 한반도와 한민족을 벗어나서 보편적으로 쓰이기가 어렵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자들은 한글이 가지고 있는 우수성을 다른 언어에 적용하려고 꾸준한 시도를 해왔으며 이번의 시도는 지금까지의 노력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찌아찌아족 사례가 그간의 시도와 차이가 있다면, 지방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하고, 교과서까지 만들어 학교에서 정식 수업으로 가르칠 만큼 적극적인 협조 아래 한글 전파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한글을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전파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이 단순히 우리의 경제 발달에 따른 한류 열풍에 의존한 세계화의 일환인가? 우리의 자랑인 한글을 이들 민족에게 베푸는 것인가?

한글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종교를 존중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세계의 모든 언어는, 표기 문자가 있건 없건,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문자가 있다고 해서, 그리고 많은 인구가 사용한다고 해서 언어적으로 우월하지는 않다. 모든 언어는 그 자체의 정연한 체계를 가진 구조체이며 사용자들의 오랜 전통과 지혜를 담고 있는 인류의 지적 재산이요 보물 창고이다. 그러나 글자가 없으면, 비록 구두로 전승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체계적으로 보존되지 못한다. 게다가 사용 인구가 적으면 언어 자체가 빠른 속도로 소멸할 위기에 처한다.

지금 세계의 언어학계는, 언어문화 다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절멸 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존하고 교육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한글이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한글이 그들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채택되고 그 언어를 기록하게 됨으로써 인류 문화의 다양성을 유지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글의 보급을 우리의 국력이 뻗어나간다는 식의 제국주의적이거나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이며 오히려 지구촌의 이웃에게 한글을 나눔으로써 함께 상생한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정신에도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훈민정음학회에서는 한글 세계화라는 말 대신에 한글 나눔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자긍심을 가지고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한글 나눔이 이루어지는 것을 성원하고, 차분히 지켜봐 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찌아찌아족에게 한글 나눔을 실천하는 데는 한 독지가의 헌신이 있기에 가능했음을 밝혀야 할 것 같다. 훈민정음학회를 설립한 여성 기업인 이기남 이사장이다. 그에게 한글 보급의 이상을 품고 수십명의 관련 학자들을 방문하여 의견을 듣고, 적절한 언어와 장소를 찾게 하여 현장을 방문하고 양해각서까지 맺고 올 정도의 열정이 없었다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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