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잠 청하는 노숙인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오전 9시 서울역 광장. 노숙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한 종교단체에서 제공하는 무료급식을 타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순식간에 불어난 노숙인들의 행렬은 마치 명절 무렵의 열차표 예매행렬을 떠오르게 했다.
밥과 반찬을 퍼주는 봉사자들의 손이 쉴틈없이 움직였지만 수백 명의 노숙인들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식판을 받아든 노숙인들은 빠른 속도로 밥과 반찬을 입 속으로 털어 넣은 뒤 자리를 떴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광장 앞에 마련된 의자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서울역선교연합회가 마련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노숙인들은 선교연합회가 2500인분의 점심 식사와 내복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다. 1시간여의 준비 끝에 오전 11시 행사가 막을 올렸다. 준비된 의자가 무색케 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지만 내용을 유심히 듣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들의 관심사는 성가대가 연주하는 캐럴송이 아닌 행사 종료 후 나눠주는 내복과 식사였다.
4년째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는 A씨(52)는 "점심과 내복을 제공한다는 소문을 듣고 영등포에서 여기까지 왔다. 오늘은 서울역 토박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선교연합회에서 나눠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 노숙인들은 흥밋거리를 찾으려는 듯 역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술판을 벌이는 이들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8년째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는 B씨(48)도 여기에 끼어 있었다.
담배를 꺼내 문 그는 이제는 일을 하고 싶어도 사회가 자신을 받아주질 않는다며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한 때 잘나가던 사업가였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사업 실패 후부터 시작한 노숙 생활이 벌써 8년이 됐다. 서울역에 오면 끼니는 해결할 수 있어 매일 오다시피 한다"고 말했다.
사업실패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재기를 하고 싶어도 노숙인이라는 딱지와 결여된 자신감 때문에 여의치가 않다. 편안한 집에서 생활하던 그는 현재 화장실에서 간신히 새우잠을 잔다고 처지를 설명했다. 그는 "서울역 화장실은 새벽에 잠을 잘 수가 없어 건물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잠을 잔다"고 말했다.
오후 3시께가 되자 술기운에 얼굴이 달아오른 노숙인들이 곳곳에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찰 중이던 경찰은 말 몇 마디로 소동을 노련하게 잠재웠다. 서울역 파출소의 한 경찰은 "이 곳에 발령난지 2년이 지났는데 웬만한 사람들의 얼굴은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안면이 있는 노숙인들에게 다가가 안부를 묻기도 했다.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을 때우던 노숙인들은 오후 6시가 되자 지하차도로 모여들었다. 마지막 끼니인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예수사랑선교회는 화요일과 목요일, 금요일 저녁 식사를 노숙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1시간 넘게 진행되는 배식으로 1000여명의 노숙인들은 배고프지 않게 긴 밤을 넘긴다.
20년 간 서울역에서 노숙인들에게 무료 배식을 해 온 김범곤 목사는 "보통 1000명 정도 오는 것 같다. 단순한 식사 한 끼가 아닌 삶의 희망을 불어 넣는 일이다. 이들이 새로운 일을 찾고 사회로 돌아가서 자리를 잡는 모습을 볼 때는 더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하루를 끝낸 노숙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잠자리로 향했다. 이 중 서울역 지하도는 오물과 쾌쾌한 냄새가 진동하지만 밤새 바람을 맞서야 하는 바깥에 비하면 참을 만한 수준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코골이 소리와 함께 노숙인들의 하루는 저물어갔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