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23:22-31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26)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I. 서론
어느 감옥에 면회하는 날이 돌아왔습니다. 친척들이
음식이나 책을 사들고 찾아와서 죄수들을 위로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매우 명랑하던 ‘Ben’이라는 죄수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그 모습을 보고 가까이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여보게, 혹시 오늘
가족들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게 슬퍼하는가? 다음 면회 때에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게.” 그러자 Ben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간수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가족과 친척이 다 감옥에 들어와 있거든요.”
인생을 살면서 슬픔을 맛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대개 무엇인가를 일어버렸을 때 슬퍼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잃었을 때, 직장을 잃었을
때, 또는 건강을 일었을 때 슬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슬픔은 역시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시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있지만, 목숨은 한 번 잃어버리면 결코 다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II. 본론
오늘 본문에서 보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 중에는 두 가지 부류 즉 1. ‘백성’과 ‘여인들’이 있었는데,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그 중에서 오직 여인들만이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두 부류 중에 ‘백성’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슬퍼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백성이 누구입니까?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 먹는 기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의하고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던 주님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그들이 슬퍼한 것은, 자신들이 당할 고난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예수님이 뒤를 돌아보면서 말씀을 주신 것은 많은 백성을 향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여인들을 향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애통해 하면서 함께 동참하는 자에게만 임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애통함이 없으면 위로도 없는
법입니다. 주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애통해 하면 주님이 위로해 주십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애통함이 있습니까?
2. 울지
않아야 할 이유
그런데 예수님은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들은 자신의 고난
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그가 받으실 고통과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슬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인간의 슬픔 중에
최고의 절망스러운 슬픔은 바로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죽는다 할지라도 슬퍼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모든 사명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만약에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이 온다 하더라도 슬퍼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영광을 차지하게 될 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든지 또는 더 나쁘게 된다면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도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영광을 확실하게 믿고 깨닫는다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라도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3. 울어야 할 이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는 울지 말고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는 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가슴을 치며 애통하고 슬퍼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1) 구원의 성취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부활에 동참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다녔던 열 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적에게 팔아
넘긴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들 중에는 가룟 유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 뉘우쳤지만, 베드로는 오히려 고기를 잡으려고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가 더 심한
죄를 범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부활에 동참하지 못하였고, 베드로는 믿음을 회복하여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그저 한 번 입으로 고백하였다고 해서 무조건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완전한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시지는 않지만,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지키는 성도로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헛된 믿음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진리이지만,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도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 있는지를 매일같이 살펴보면서 애통해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2) 고난의 극복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 앞에서 쓰러지고
좌절할 가능성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임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나 공평하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 말을 다른 각도에서 하면, 세상을 사는 고난 역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말씀에 의지하여 소망을 가지고 극복하고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2절에서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 이하에서도,
성도들이 당할 고난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 고난을 쉽게 이겨낼 수 있지만, 세상의
편과 하나님의 편에 양다리를 거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극렬하게 타는 풀무불과도 같이 어려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그 고난을 이기기 위하여 울어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3) 신앙의 전수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엘리’라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들은 불량자였고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제사장이라고 해서
아들들에게 자동적으로 신앙이 전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들은 결국 적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고, 그 집안의 대가 끊어졌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경험과 기억을 간직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깨어나게 되어 있고, 이 땅에서 만났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곳에서 사랑하는 부모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자녀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얼마나 애통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구원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
III. 결론
볼티모어에 사는 어떤 철도 기관사에게 사랑하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몸이
몹시 허약했던 그 외동딸은 매일 오후 2시에 자기 아빠가 운전하고 지나가는 기차를 향하여 손을 흔드는 것을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기차를 잘 볼 수 있도록 울타리의 말뚝을 몇 개 뽑아주었습니다. 어느 날 딸의 모습이 울타리 밖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관사가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딸은 조그만 메모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그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아빠, 저는
예수님에게 가서 하늘나라 울타리에서 말뚝 몇 개를 뽑아달라고 부탁하겠어요. 그래서 아빠와 엄마가 오실 때까지 바라보고 있을 거예요.”
성도 여러분,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고 목숨을 내어주신 것에 대하여 애통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우셔야 되겠습니까? 누구를 위해 우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유언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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