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26)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I. 서론
어떤 가난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강 건너 편에 있는 황금빛으로 물든 집을 보면서 부러워하였습니다. “저 황금빛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초라한 자기 집을 보면서, 그 소년은 늘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그 행복을 맛보고 싶어서 강을 건너갔습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던 그 집 가까이 다가간 소년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집 역시 자기 집과 다름이 없는 초라한 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실망하여 돌아가던 소년의 눈에 또 다른 황금빛 집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녁노을의 황금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는 자기 집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행복론은 많이 소유하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좀 더 많이 소유하려고 뜁니다. 그러나 도대체 얼마만큼 소유하면 행복해지겠습니까? 또한 세상의 행복론은 “억지로라도 웃어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참된 행복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행복론과는 전혀 반대되는 행복론을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라. 그러면 행복한 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복론”입니다.
II. 본론
1. 애통함과 위로함
마태복음에서 말씀하는 “애통한다”는 말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pentheo'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회개의 설교를 듣고 우는 농부) 그러한 최고의 슬픔을 가진 자가 어떻게 ‘복이 있는 자’ 즉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러한 자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어적으로 볼 때, ‘위로’라는 말은 “청함을 받는다” “격려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최고의 슬픔 중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청함을 받고 격려를 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위로를 받고싶어합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 받고싶어서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면, 우리는 정녕 예배에 성공하는 자가 되고, 복 있는 자가 되고, 참으로 행복한 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2. 누구를 위해 애통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애통해 하는 그 상대방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돈을 위하여 애통해 한다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돈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의 명예를 얻지 못하고 출세하지 못한 것을 애통해 한다면, 오직 세상의 명예와 출세만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돈이나 세상의 명예나 출세나 권세가 우리를 참되게 그리고 영원히 위로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 보니 많은 여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시는 (1) 예수를 위해 애통해 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슬퍼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잘못하면 로마 당국자들에게 붙잡혀서 핍박을 받을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애통함이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 여인들의 애통함은 조금도 거짓이 없는 그리고 꾸밈이 없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애통함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의 애통하는 모습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위로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걸어가는 그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사람은 오직 애통하던 그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애통하시렵니까? 세상의 일을 위해 애통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애통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직접 여러분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2) 너희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그 애통함과 눈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는 세상의 물질적 축복을 위해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축복도 당연히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다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 자신이 구원함을 받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만약에 그 질문 앞에서 망설여진다거나, 확신이 없다면, 그 사람은 지금 당장 자기 자신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해야 합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마음이 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 회개하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애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애통해 할 자격이 벗습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애통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의 구원받음 즉 영생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3)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녀의 구원을 위해 애통하지 않는 부모들은, 그 자녀들의 구원받지 못함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7장 34절에 보면, 야곱의 애통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동물에 찢겨서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였습니다. 만약에 야곱이 요셉을 위하여 애통하지 않았다면, 그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그의 말년에 요셉으로 말미암아 위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가서 1장 8절과 9절에,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통하심입니다. 만약에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주님께서는 위로 받지 못하시고 계속 애통해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을 향한 우리의 애통함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끝으로 우리가 반드시 3. 애통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그 날이 있기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그 날은 심판의 날인 동시에 구원의 날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는 멸망이 임하는 저주의 날이요, 구원받는 자에게는 영생이 임하는 축복의 날입니다. 그 날은 바로 예수님의 날이요, 나의 날이요, 또한 우리의 자녀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 날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그 날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생각하며 애통해 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청함을 받지 않으면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애통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청장이 없으면 아무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의 청하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탁이기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애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우리가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III. 결론
요한계시록 18장 11절과 15절 그리고 19절에서 애통하는 자들은 “미리 애통하지 못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심판이 임한 후에 후회하며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이미 때가 늦은, 위로함을 받을 수 없는 애통함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요한계시록 21장 1절부터 4절에서 증거 하는 사람들은 “미리 애통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이 직접 그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해 주시는, 참된 “복 있는 자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시편 126편 6절에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날마다 자기 가슴을 치며 애통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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