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11, 2012

복이 있나니-I “심령이 가난한 루디아” (4/7/2002)

본문 : 마태복음 5:3, 사도행전 16:11-15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11)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I. 서론
부모님 치고 자기 자식이 잘 되고 복을 받는 것을 싫어할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인 우리들이 잘 되고 복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신 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복”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운수가 좋아서 편안하고 만족한 기쁨을 누림” 또는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 그리고 그로 인하여 얻는 기쁨과 즐거움”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가장 큰 복을 다섯 가지로 꼽았습니다. 첫째는 오래 사는 것, 둘째는 부귀를 누리는 것, 셋째는 귀하게 되는 것, 넷째는 강하게 되는 것, 다섯 째는 자손들이 번창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이루어지면 마음이 편안하고 만족하고 기쁘고 즐겁게 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과연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얼마 전에 영국에서는 두 경제학자가 “당신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였고, 영국 돈으로 약 5만 파운드, 즉 한국 돈으로는 약 1억 원, 미국 돈으로는 약 100만 불이 있으면 행복해진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두 경제학자가 결론적으로 말한 것은, 5만 파운드를 소유한 사람들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5만 파운드를 소유한 사람은, 그 돈에서 1파운드만 줄어들어도 금방 불행을 느끼고, 그 돈을 지키기 위해 날마다 고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II. 본론
1. 천국을 소유하는 복
돈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을 것이고, 돈이 있으면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돈을 많이 소유한 자라도, 그보다 더 많이 소유한 자 앞에서는 부족한 자가 됩니다. 만약에 돈이나 물질이 행복의 기준이라면, 이 세상에는 참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이러한 상대적인 복이 아니라 절대적인 복입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상대적인 개념에서 복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그가 복이 있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천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호흡 곤란을 느끼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높이가 약 4,000미터인 반면, 두루미는 히말라야산맥보다 높은 7,200미터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만큼 높은 산은 다 쉽게 넘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소유한 자는 아무리 태산 같은 문제가 와도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복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천국을 소유하는 절대적인 복 있는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가난한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자동적으로 복 있는 자가 됩니다.

2. 가난한 자 - 루디아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라고 생각하는 오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이 말씀도 이사야서 66장 2절에서 말씀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성경의 인물들 중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하는 루디아는 천국의 소유자가 되기에 합당한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 당시에 자주장사는 귀족들에게 소용이 되는 옷감 또는 의복을 취급하던 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아, 루디아는 물질적으로 부유한 여인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 의하면, 여러 여인들 중에서, 오직 루디아라는 한 여인만이 복음을 받아들여 천국 시민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외부의 물질적인 환경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돈이 많이 있는 부자도 심령이 가난한 자일 수 있고, 돈이 없는 거지라도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자일 수 있습니다. 루디아는 평소에 심령이 가난한 자였기 때문에, 지나가는 하나님의 복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3. 심령이 가난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루디아라는 여인으로부터 세 가지를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1)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14절에 의하면,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원문대로 해석하면 그녀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자”였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만날 자를 미리 예비하시고, 만날만한 환경을 조성하시고, 때가 되면 만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우연’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루디아가 성공적인 예배자가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다른 여인들처럼 이 기회를 붙잡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증거하는 말씀이 그녀의 마음의 문을 두들겼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한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2) “마음을 열고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 속에 주어지는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기회가 왔을 때, 즉시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열었다는 말씀은 나를 비웠다는 말입니다. 그릇 속에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로 채워져 있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담고 싶어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릇이 아무리 깨끗하게 비어 있어도 뚜껑이 닫혀 있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은 무엇을 채워져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의 문을 닫고 있는 뚜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들이 심령의 그릇 속에 있으면 먼저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뚜껑이 있으면 그것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것으로 다시 채움을 받고자 진심으로 갈망하는 상태가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항상 심령을 비어 있는 상태, 열려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으로 주실 때, 입술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반응해야만 합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마음을 열고 반응하는 방법입니다.
셋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3) “강권하여 대접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바울과 그의 일행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바쁘게 여행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루디아와 그의 식구들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는 곧 그들로부터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루디아는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잘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이제 갓난아이처럼 복음 안에서 새로 태어난 루디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고싶어하였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간절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바울과 그의 일행에게 강요하다시피 하면서 자기 집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물질적인 손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난하던 심령을 채워준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그것들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디아는 정녕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대변자 또는 대행자를 전심으로 공경하십시오. 그들을 분별하여 알아보고,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함께 이루기 위하여 여러분의 물질과 수고를 드리십시오. 요한복음 13장 20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그를 영접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내신 사람이 여러분 앞을 그냥 지나가고자 한다면, 루디아처럼 강권해서라도 그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루이다가 강권하면서까지 바울 일행을 붙잡지 않았다면, 그녀를 통해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III. 결론
버나드 쇼는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병입니다. 도대체 왜, 행복을 소비할 것만 생각하고, 그 행복을 내가 생산할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까?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복 있는 자가 되어, 행복을 생산하여 나누어주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복 중에도 최고의 복, 천국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십시오.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시고, 심령의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시고, 강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십시오. 그렇게 생각하고 행하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충만하게 임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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