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10, 2012

고난과 부활-I “내가 내려와서” (4/1/2001)

본문 : 출애굽기 3:1-8

(1)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4)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7)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I. 서론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생 여정 속에는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고난과 시련이 다가옵니다. 어떤 때에는 예상치 못하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당하기 때문에 매우 당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난이 다가올 때, 가난한 자 보다는 오히려 부자가 그 고난을 훨씬 더 이겨내기 힘듭니다. 항상 배고프게 사는 사람은 한 끼 굶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지만, 매일같이 풍성하고 호화로운 식사를 즐기던 사람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루시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 말씀에 보면,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영원한 세계, 완전한 세계, 어두운 그림자가 없는 빛의 세계의 주인이 아니십니까? 그러한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다는 것은, 영광의 보좌를 떠나 물질적인 고난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한 끼를 굶는 것이 부자에게 큰 고난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 있어서는 “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기꺼이 당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그러한 고난의 종으로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곧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되는데, 주님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II. 본론
우리가 실제적으로 당하는 고난을 살펴보면 대개는 결국 1. ‘나’를 위한 고난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려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 혼자서만 그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난, 어떻게 보면 더 큰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잘 헤쳐나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 만약에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렇지를 못합니다. 분명히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에 그 고난이 시작되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어려움에 대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나 이웃 또는 환경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불평불만이 겉으로 표현되게 되고, 결국 남들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에 겪게 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 고난을 이겨낸 분도 아니었습니다. ‘나’의 문제로 인한 고난이라면 ‘나’를 위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당하신 고난은 전혀 그러한 차원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2. ‘너’를 위한 고난
‘나’를 위한 고난의 차원보다 좀더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은, ‘너’를 위한 고난일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인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나의 사랑하는 배우자를 위하여, 나의 자녀 또는 부모님들을 위하여 내가 대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고난보다는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요즈음 Laura Doyle라는 여인이 쓴“The Surrendered Wife”라는 책이 best seller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은, Laura가 남편 John에게 자기 기준을 끊임없이 요구함으로써 가정 안에 날마다 싸움이 끊어지지 않았고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아내 Laura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도권을 남편에게 내어줌으로써 문제가 해결되고 가정에 평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왜 best seller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니, 아마 모든 남편들이 이 책을 사다가 아내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갔습니다.
여러분, 내가 사랑하는 아내, 내가 사랑하는 남편, 연애 시절에는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바로 그 사람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내가 대신 고난을 당하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그런 종류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특정인만을 사랑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원수들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에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고난을 당했는데, 그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여러분에게 감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섭섭함이 지나쳐서 미워하는 마음까지 생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실 때, 어떤 특정인을 위해서 하신 것도 아니었고, 또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에 의하면, 3.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피조물도 흉내낼 수 없는 위대한 고난이었습니다.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을 증거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1) 예고된 고난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이 땅으로 직접 내려오시겠다고 결정하셨을 때, 그 고난이 이미 예상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훨씬 전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고 무덤에 묻힐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들은 미리 예상되는 고난보다는 불시에 찾아오는 고난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인간들은 고난 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만약에 그것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요즈음에 한국에서 IMF다 뭐다 해서 살기가 어려워지니까, 늙으신 부모를 차에 싣고 멀리 가서 버리는 일들이 생기고, 어린 자녀들을 집에 두고 도망가 버리는 아버지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이 생기고 있습니까? 자기가 당하게 될 고난이 싫어서 천륜까지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리 예고된 고난에 당당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오실 메시야를 묘사하고 있는 이사야서 53장 3절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으실 것을 미리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 고난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36절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문제 때문에, 불신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가까운 자기 가족으로부터 원수처럼 대접을 받는 일도 생기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17절부터 18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고난의 뒤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이다음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도 누리게 되겠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분명하게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고난은 2) 자발적 고난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고난은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싫어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좋아한다고 해서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대개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겪게 되어 있고, 그러기에 그 고난을 이겨내기가 힘들며,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특정 인물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고난을 이겨낼 수 있겠지만, 아무 관계도 없고 어떤 유익도 예상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본문 8절에 “내가 내려와서”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려오는 결정을 주님이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창조주의 자리에서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오는 이 심각한 고난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과 18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자기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당당하게 순교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저와 여러분도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3) 사랑의 고난이었습니다. 본문 8절에 의하면, 구원받을 백성들을 “건져낼”뿐만 아니라, “인도할”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불순종과 반역이 끊임없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결국 약속의 땅,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오래 전에 이미 그 고난이 있을 것을 아셨고, 자발적으로 그 고난에 참여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버리신 것은, 우리 인간을 향한 최고의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힘이 없어서, 또는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당하신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십자가는 고난의 십자가이기 이전에 사랑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III. 결론
톨스토이가 쓴 글들 중에 “황제와 청소부”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임금이 어느 날 왕궁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귀족들에게, “내일 여러분을 심사해서 1등에 뽑힌 신하에게는 내 옆에 앉히고 많은 상을 주겠다”고 공표 하였습니다. 다음날 귀족들은 최고의 예복을 입고 왕궁에 들어왔습니다.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분주하게 준비를 한 후에 심사하는 자리로 왔습니다. 그 때 임금님이 들어와서 말합니다. “자, 모두 한 줄로 서서 손을 내밀어라.” 다 돌아본 임금님은 부엌에서 일하는 한 여종을 지목하여 1등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가장 충성스럽게 일한 표시가, 검게 그을리고 부르트고 거칠어진 손에서 증거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시는 것은 인간을 위한 최고의 고난을 기꺼이 받으시고 이겨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기 위하여 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덕분에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늘 마음속에 지니고 사심으로써, 이 땅에서 잠시 당하는 약간의 고난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이겨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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