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히브리서 12:4-13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I. 서론
10여년
전에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눈에 띄게 비교된 것들 중에 하나는 나무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똑바로 자란 나무를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보면 시원스럽게 쭉쭉 뻗어 올라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단순히 나무의 종자 때문에 또는 땅 속에 있는 양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한국에 가보니, 산마다 숲을 이루고 있었고, 곧게 뻗어 올라가는 나무들도 쉽게 눈에 띄었습니다.
나무가 어떻게 자라는가 하는 것은, 다만 나무의 종자 또는 땅의 비옥한 정도 때문이 아니라, 그 나무들을 처음 심고 자라게 할 때 어떻게
가꾸느냐에 더 많이 관련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는 산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나무가 똑바로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결과의 차이는 식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II. 본론
1. 하나님의 징계
우리말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습성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신앙이 아직 어렸을 때 바로 잡으려고 하십니다. 이렇게 바로 잡는 일이 성경에서는
“징계한다”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징계”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어린이를 훈계하다”라는 뜻인데, 전통적으로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 단계는 말로 하는 것, 두 번째는 해악과 재난을 가하여 훈계하는 것, 세 번째는 때려서 징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징계를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집에 형제가 둘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무척 아끼시는 도자기를 깨뜨렸습니다. 동생은 꾸중듣는 것이 무서워 울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어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셨습니다. 그 때
동생은 자기 형이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버지, 사실은 오늘 제가 실수를 해서 아버님이 아끼시는 도자기를 깨뜨렸습니다. 저에게
벌을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즉 구원받을 모든 인간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받아야 할 징계(6,8절)를 대신 받아주시는 모범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생에 대한
사랑으로 벌을 대신 받겠다는 형처럼, 예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 값을 치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2. 징계의 유익
하나님이 죄 지은 인간들을 징계하시는 이유는, 욥기 5장
17절의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0장 17절, 12장 1절).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징계의 결과로 의의 평강의 열매가 맺힌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잠언 13장 24절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에 의하면 이 징계는 참 아들 되는 표상이
되기까지 합니다. 징계는 부모가 자식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모범생이던 어느 소년이 갑자기 문제아로 돌변하게 되어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친자녀가 둘 있었고, 이 소년은 어렸을 때 그 가정에 입양이 되었습니다. 양부모는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친자녀들보다도 더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소년은, 똑같이 잘못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친자녀들에게는 매를 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런 벌을 주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부모님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고민하다가 성격이
삐뚤어지고 결국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징계, 하나님의 징계는 자녀에 대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만물이
그의 발앞에 굴복하는 영광을 얻으셨고, 우리는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3. 십자가로부터 우리가 받을 교훈은, “참 아들이 되려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첫째 교훈은 (1)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면, 자신이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인내함으로 그 징계를 이겨내지 못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 쉽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사람들
또는 나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0절에 “범죄한 자들을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씀하듯이,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목적은 그 나라 또는 그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 사람들까지도 똑바로 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 중에 힐렐이라는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제자가 그에게 왜 그토록 급하게 길을 걸어가느냐고
물었습니다. 힐렐은 “최고로 좋은 일을 빨리 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궁금하게 생각한 제자가 따라갔더니 그 스승은 공중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때를 열심히 밀었습니다. 그리고 따라온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자기를 씻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선행의 시작이다.” 그렇습니다. 나의 죄를 씻고 나의 자아를 버리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나님께로 가겠습니까? 그 길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뿐입니다.
둘째 교훈은 (2) “그를 더욱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똑바른 방향으로 더욱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부터 16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세우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각자 자기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징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방향이 잘못되거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징계를 받는다는 말은, 내가 아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알곡을 골라낼 때에 키질을 하면 할수록 알곡이
앞쪽으로 나오는 것처럼, 징계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감사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며 하나님을 더욱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그렇게 할 때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예비한 복을 우리에게 한없이 주실 것입니다.
셋째
교훈은 (3) “고침을 받게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징계를 해도 자기 자녀가 고침을 받지 못하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차라리 징계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가슴을 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똑같은 마음이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으면
고쳐야 합니다.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는 사무엘하 7장14절 말씀처럼, 어떤 때에는
사람을 통해서, 어떤 때에는 인생의 환경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러한 징계를 받을 때에, 그 징계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징계를 주는 그 사람 또는 환경을 미워하고 불평불만하고 원망하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되었던 것들이 “고침을 받게 하라”는
것입니다.
징계를 받고도 고침을 받지 않는 자녀는 그의 아버지를 슬프게 합니다. 아버지가 예비하신 복을 내 발로 차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고침 받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침 받는 일에는 아픔이
따라옵니다. 예수님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고통을 인내하신 것처럼 우리도 인내해야 합니다.
III. 결론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면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징계 받은 나라들과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억하며,
내가 징계 받을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공경함으로써, 모든 연약함과 삐뚤어짐이 날마다 고침 받는 여러분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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