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26:6-16
(6)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9)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1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14)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16)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I.
서론
얼마 전에 인도에서는 ‘술에 맛들인' 야생 코끼리 떼가 술을 찾기 위해 농경지를 마구 짓밟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현지 관리들이 발표하였습니다.
관리들은 코끼리 떼가 지난 2주 동안 인도 북동부 “아삼Asam” 주(州)에서
파괴행위를 일삼았으며, 쌀로 만든 술을 많이 만드는 지역에서 특히 더 행패가 심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코끼리 떼의 행패는 술을 만드는 지역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술맛에 눈뜨면서부터 시작됐으며, 이들이 술을 찾아 헤매고,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진흙과 초가지붕으로 된 가옥들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지주민 대부분은 술을 찾아 헤매는 코끼리 떼를 피해 밤에 함께
모여 지내고 있으며 다행히 아직까지는 코끼리 떼에 밟히는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코끼리들이 술주정을 하다니,
말이 좀 안 되는 것 같지요? 그러나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코끼리들이 자기가 코끼리인 것을 잊어버리고, 코끼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잊어버리면 이러한 해괴망측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면,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II. 본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상황이 눈앞에서 일어날 때, 잘 판단하고 선택을 해야 합니다. 술에 취한 코끼리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하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큰 낭패를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잘못된 방향으로 선택을 한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함께 지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반대편 무리들에게로 가버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배반자가 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비참한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가룟 유다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어떤
상황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가룟유다는 1. 나와 같은가 다른가?
하는 기준으로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늘 나와 같은 쪽을 선택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갖고 나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이 여자가 비싼 향유를 쓸모 없는 일에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 마음 속에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들의 생각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는 “제자들이 보고 분노하여 말하였다”고 하였는데, 요한복음 12장 4절에 의하면, 노골적으로 그 분노를 표시한 사람은 바로 가룟
유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 여인이 자기 생각과 다른 행동을 했을 때, 그 이유나 목적 또는 사건의 배경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자기 경험과 생각의 기준으로 판단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자기와 다른 것은 무조건 배척하고 자기와 같은
것은 무조건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거기에 나를 어떻게 변화시켜서 맞출 것인지를 생각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나에게 맞추도록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고치지 않는 사람은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믿음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참된 신앙으로 말미암는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대로 남을
책망하고 원망이 가득 차게 됩니다. 결국에는 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자기를 파괴시키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판단하고 선택할 때, “나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를 기준으로 하지 마시고, “진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주님이 기뻐하시는가?”를 기준으로 하시는 지혜로운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가룟유다는 2.
내게 이득인가 손실인가? 하는 기준으로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늘 지금 당장 내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선택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니까, 예수를 넘겨주는 대가로 대제사장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었을 때, 가룟 유다는 서슴지 않고
그들 편에 가담하였습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며 3년이 넘도록 따라다닌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게, 모든
제자들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나쁜 영향이 미치게 될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직 가룟 유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명령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큰 손해를 보는 것처럼, 점점 더 나빠지는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과는 상관없이 지금 당장 나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하게 되면, 가룟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3년이 넘도록 예수님을 그토록 열심히 따라다녔지만, 한 번도 그 수고비를 받아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사역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느라 힘들었던 기억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는 사도 집단의 회계를 맡았던 자였으니, 그 고충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바리새인들을 만났더니, 그저 말 한 마디에 은 삼십을 선뜻 내주었습니다.
은 삼십은 그 당시에 아주 건장한 남자 노예 한 사람의
값에 해당하는,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받은 가룟 유다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지금 당장의 이득과 손실을 비교해 보았을 때, 어느
쪽이 더 그의 마음에 들었겠습니까?
자신이 속한 공동체 전체의 이득과 손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장차 가다올 미래의 이득과 손실을
따져볼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지 못하면, 이 가룟 유다처럼 됩니다. 당장에는 좋은 것 같으나 결국에는 멸망을 당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은 가룟 유다처럼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가룟유다는 3. 나를 칭찬하나 책망하나? 하는 기준으로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늘 자신이 칭찬 받는 쪽을 선택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하여 분노하는 말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오히려 그 여인을 칭찬하고 가룟 유다를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룟 유다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하였을까요? 아마 기가 막혀 아무 말도 안나왔을 것입니다.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자는 말이 뭐가 잘못입니까? 칭찬을
받아야 될 일이 아닙니까? 그 돈을 자기가 쓰겠다는 것이 아니었는데요...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가룟 유다에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상처는 아마도, 공생애 기간 내내 주님을 모시고 다녔던 제자들 앞에서 보잘것없는 한 여인이 크게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더 컸을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그 여인의 행한 일도 같이 증거 하라 하셨으니, 얼마나 큰 칭찬입니까?
성도들 중에도 이렇게
자신이 칭찬 받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남들이 칭찬 받으면 속이 아파서 견디지 못합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책망이 내려지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크게 화를 냅니다. 잠언 13장 1절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책망을 받고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주님의
칭찬이 임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지혜로운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III. 결론
성도 여러분, 참된 신앙은 올바른 선택의 과정과 결과입니다. 어떤 상황 앞에서 결정을 할 때, 가룟 유다처럼 선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장에는
손해가 오고 고난이 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이 성공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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