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12, 2012

“바리새인의 선택, 나의 선택” (7/14/2002)

본문 : 요한복음 9:13-22

(13)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17)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18)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 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I. 서론
각각 두 아들을 둔 두 어머니들이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아들들의 직업이 똑같았는데, 큰 아들은 우산을 파는 장사를 하였고, 작은 아들은 아이스크림을 파는 장사를 하였습니다.
한 어머니는 늘 한숨과 슬픔 속에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날씨가 좋으면 우산을 파는 큰 아들 생각을 하면서 장사가 잘 안될 것이 걱정 되었고, 비가 오면 작은 아들의 장사가 안될 것을 생각하며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어머니는 늘 기쁨과 감사 속에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날씨가 좋으면 아이스크림을 파는 작은 아들의 장사가 잘 되는 것이 좋았고, 비가 오면 큰 아들의 우산이 잘 팔릴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어머니의 자녀들이 사업에서 성공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슷한 나이의 자녀를 둔 두 어머니가 한 동네에 살았습니다. 경제적인 면이나 교육적인 면으로 볼 때 두 어머니는 매우 비슷한 수준이었고, 취미도 똑같아서 늘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운 친구로 지냈습니다. 아이들의 건강 상태나 학교 성적도 비슷하였습니다. 그러나 꼭 한 가지 서로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녀를 교육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한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완벽해질 것을 요구하며 엄격하게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혹시 무엇을 잘못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늘 감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점을 지적하여 고쳐주었고 실수를 하면 야단을 치거나 벌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무서워서 말을 잘 들었고, 공부도 잘 하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다른 어머니는 상당히 낙천적인 방법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잘못한 것을 찾아내서 꾸중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잘 한 것이 있을 때 칭찬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아이의 단점을 고쳐주기보다는 장점을 찾아내서 키워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느 어머니의 자녀가 성공하였겠습니까?
두 사람이 시골길을 걸어갑니다. 한 사람은 계속 탄성을 지릅니다. “야, 저것좀 봐, 이 들판에 저렇게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다니! 저 나무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지 않니?”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계속 투덜거립니다. “여기에는 웬 잡초들이 이렇게 많은거야? 그리고 저 나무들좀 봐, 온통 벌레 투성이잖아! 푸른 하늘이 아름답다고? 내 눈에는 지저분하게 떠다니는 구름 밖에 안보이는데?
햇빛이 비치면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이 생기는 것처럼, 높은 산이 있으면 깊은 골짜기가 있는 것처럼, 동전에는 늘 양면이 함께 있는 것처럼,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을 먼저 찾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것을 먼저 찾으려고 합니다. 때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판단하고 선택하는 태도가 어느 한 쪽으로 습관처럼 굳어져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에서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한 청년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선천적인 소경이 눈을 뜨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한 기적의 사건이었습니다. 메시아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뜬 본인에게는 무한히 기쁜 순간이었고, 온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직접 보고 경험한 유대인들은 눈을 뜨게 된 그 소경의 기쁨과 감격에 함께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잔치를 벌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것을 자랑하며 전파했어야 합니다. 마치 월드컵 축구에서 우리 선수들이 이겼을 때 온 국민이 함께 열광하며 기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 중 특히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 속에서 어두운 면을 찾아내려고 하였습니다.

II. 본론
바리새인들은 나쁜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스스로는 믿음이 최고로 좋다고 생각하였으나 주님으로부터는 말할 수 없는 큰 책망을 받는 불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평소에 부정적인 면을 찾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고, 습관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 가지의 공통적인 생활신조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첫 번째 생활 신조는, 어떤 경우에든지 장점을 찾기보다 1. “단점을 찾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어겼다”는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하나님의 기적은 오히려 안식일에 더 많이 발생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룩한 안식일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으니, 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소경 되었던 자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좋은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이 깨뜨렸으니 엄하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단점을 찾아내려는 사람 앞에 단점 없는 완전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여러 가지 단점들이 지적되어 결국 십자가에 처형되셨는데 말입니다.
단점을 찾아내는 일은 그 사람 또는 그 공동체를 죽이는 일입니다. 반면에, 장점을 찾아내는 일은 그 사람 또는 그 공동체를 살리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죽이는 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살리는 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의 두 번째 생활 신조는, 진실이 내게 불리하면 그 2. “진실을 왜곡시켜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 되었다가 눈을 뜨게 된 그 청년이 직접 진실을 증언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계획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청년의 부모를 불러다가 심문을 하듯 따져 물었습니다. 청년의 부모가 진실을 말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24절 이하에 보면, 그들은 그 청년을 다시 불러서 따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실을 왜곡시키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미국은 주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주에는 사형제도가 있고 어떤 주에는 없습니다. 사형제도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찬성하고 어떤 사람은 반대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든지 진실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수사관들의 실수에 의해서, 사건을 빨리 마무리지으려는 경찰관들의 음모에 의해서, 또는 자기 유익을 위한 어떤 고의적인 목적에 의해서 진실이 왜곡되어 애매한 사람에게 사형 언도가 내려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살인죄가 아니겠습니까?
진실을 왜곡시키는 일은 그 사람 또는 그 공동체를 죽이는 일입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알리고 인정하는 일은 그 사람 또는 그 공동체를 살리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세 번째 생활 신조는, 자신들에게 유익이 될 때에는 그 3. “문제점을 확대시켜라.”라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이 사건이 발생되기 이전에 이미,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공생에 초창기에 이미, 유대인 지도자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 시키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 당신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교”는 곧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면 유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경제적인 생활도 전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디든지 문제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점이 발견되면 모두가 협력하여 그 것을 좋은 방향으로, 선한 방법으로, 전체에게 유익이 되도록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살아납니다. 반대로, 어떤 개인 또는 일부 집단의 유익을 위해 문제점을 확대시키면 거기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III. 결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현장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잘 분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공적인 신앙인이 되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편을 습관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도록 평소에 훈련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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