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18, 2012

천국사다리(41) - “지으신 이의 뜻" (마태복음 19:1~12) [2007-10-7]



본문 : 마태복음 19:1~12 10/7/2007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주인과 종업원이 협력해야 합니다. 만약에 주인의 뜻과 종업원의 뜻이 서로 달라서 계속 충돌하게 되면 망하는 기업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서로 일치된 마음으로 일하게 되면 흥하는 기업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과거에는 오랫동안 전 세계를 지배해 왔었지만 지금은 망하는 기업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회사측과 노조가 서로 갈등하며 투쟁을 일삼아 온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의 뜻과 피조물의 뜻이 충돌하게 되면 천국건설이 후퇴할 것이고, 일치하면 천국건설이 크게 흥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게도 일치보다 충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왜 이러한 충돌이 일어날까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될 진리는, 종업원 뜻이 주인 뜻보다 앞설 수 없는 것처럼, 피조물 뜻이 창조주 뜻보다 앞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창조주께서 자신의 뜻을 선포하셨을 때, 피조물들에 그 뜻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첫째는 고의로 거부하는 사람, 둘째는 거부하지는 않지만 억지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리고 셋째는 자원함으로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기업의 주인이라면 어떤 종업원을 원하시겠습니까?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라면 어떤 자녀를 기뻐하겠습니까?

1. 자기만족만을 위해 사는 사람
첫째로, '고의로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 뜻이 '자기만족'과 반대되기 때문에 거부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 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흥망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자기만족에만 관심을 둡니다. 3절 말씀처럼, 아무 이유 없이 아내를 쫓아냅니다. 아내가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될지, 이웃에게 어떤 충격과 영행을 주게 될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다서 1:7" 경고를 받은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롯의 아내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8절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모세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9절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도 죄인으로 규정하시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2. 외식을 위해 사는 사람
둘째는, 하나님의 뜻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만 변화되는, 외식을 위해 사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껍데기는 점점 더 단단해져서 아무것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세상의 도덕과 윤리 또는 율법과 전통을 앞세워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자 하고 자신을 방어함으로써 남들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도 주저함 없이 가담하였습니다.(3,7절)
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율법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의로운 일이라고 생각되더라도,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한다면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3.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
그러면 인간들 중에는 그러한 부류들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2절은 "천국 위해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위해 즉,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모범입니다.
'지으신 이의 뜻'은 곧 '진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원함으로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행하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때 비로소 기쁨과 감사함으로 천국시민으로서의 생활을 하고 율법을 준행하며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러한 체험을 하고 빌립보서 4장 11-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얼마 전에 신문에서 "테레사 수녀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과 자신의 믿음에 대해 깊은 고뇌를 겪었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내용으로 기사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66년간 동료 신부 등과 주고받은 서한으로 엮어진 책 "마더 테레사: 나의 빛이 되어 주소서"를 통해 밝혀졌는데 타임지가 웹사이트에 책 내용을 발췌해 보도하면서 알려졌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는 지난 1979년 9월 미하일 반 데어 페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아주 특별한 사랑을 주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라고 신에 대한 고뇌의 감정을 밝혔고, 1953년 페르디난드 페리에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마치 모든 게 죽은 것같이 제 안에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 제가 신의 일을 망치지 않도록 기도해주세요"라며 간절한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1997년 87세의 일기로 사망한 테레사 수녀는 평생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희생했습니다. 이번 책을 통해 밝혀진 그녀의 내적 번민이 그녀가 이 같은 희생을 견뎌내고 성도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토록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본을 보임으로써 '복자'의 칭호를 받게 된 테레사 수녀이지만, 만약에 그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또는 외식을 위해서 그러한 삶을 살았다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의 희생이 그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요? 그러나 만약에 그녀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 진리를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실천하며 살았다면, 아무리 큰 번민과 혼란 속에 빠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하였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과 영원한 복이 임하였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을 '지으신 이'의 뜻 행하십시오.
진리를 깨달고 실천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십시오. 그리하면 천국사다리를 앞장서서 올라가는 성도가 될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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