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18, 2012

천국사다리(37) - “아들이 내는 성전세" (마태복음 17:24~27) [2007-8-19]



본문 : 마태복음 17:24~27 8/19/2007
(24)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요? 세상을 무조건 미워해야 될까요? 세상은 악한 것이니 아무렇게나 피해를 입혀도 되는 것일까요?
'변화산'에서의 경험이 있은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남은 사역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 중에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려 하거나 세상 법으로부터 예외가 되고자 하거나 또는 세상에 피해를 입힘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위하여" 또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태도로 인하여 당하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교훈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성전세
본문에서 '반 세겔'은 모세 당시에 20세 이상 된 이스라엘 남자들은 각각 자기 목숨 값을 대신하는 속전으로 하나님께 바쳤던 성소의 세겔을 말합니다. 반 세겔은 10게라씩이었는데,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똑같이 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속전으로 취한 이 '반 세겔'은 회막 봉사에 쓰였습니다.
당시의 세겔은 일반용의 가벼운 것이 있었고 ‘성소의 세겔’이라 불리는 일반 세겔(11.42g)의 2배 무게의 신성한 세겔(22.84g)도 있었습니다. 성인 남자의 반 세겔은, 고대에는 중량을 재서 바쳤으나 후대에는 성전세를 위해 특별히 은화를 만들어 1년에 한 번씩 바쳤고, 포로 귀환기에는 보다 가벼운 바사 표준으로 3분의 1세겔을 바쳤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 남자들은 해마다 출애굽기 30:13-16에 의거하여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너희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물었는데, 여기서 '반 세겔 받는 자'란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복음사역으로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바빴기 때문에 성전세를 내야만 할 기일을 어기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와 그 일행을 핍박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내지 않는다.
성전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이므로, 그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성전세를 내라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 역시 성전세를 의무금으로 내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성전세 즉 의무금이기 때문에 억지로 내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감사의 예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서 반드시 여러 배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3. 인간의 아들로서 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아들'로서 성전세를 납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천국시민(천국사다리 오르고 있는)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 지켜야 할 본분이 무엇인지를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로, "약속한 것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세를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따질 때(24절),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성전세를 내라고 하느냐?"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태도에 대해 흥분 또는 분노함으로 인하여 아무 생각 없이 "내신다"고 대답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에게는 성전세용 은전이 수중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미 약속하였으니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한 유명한 말을 기억합니다. '법'이라는 것은 사회 또는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구성원들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깨지거나 힘을 잃게 되면 그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들 또는 교회가 약속을 쉽게 어기거나 세상의 법을 우습게 여긴다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6. 25전쟁 때 아들을 인민군에 강제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인민군은 남한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속한 부대가 마침 고향 근처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는 평소 자신과 가까운 상관에게 집에 잠시 다녀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고, 그 상관은 그를 믿고 아무도 모르게 내보내주었습니다.
아들이 살아 돌아오자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꼭 돌아가야만 하는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가족들은 바보 같은 짓이라며 반대했지만, 목사인 그의 아버지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약속을 지켜라.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를 보내준 네 상관이 죽는다. 가라!"
가족들과 눈물로 이별을 한 그는 날이 밝기 전에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그 부대는 국군에게 쫓겨 북으로 도망하는데, 미군 전투기가 이들을 향해 폭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상관과 구덩이에 몸을 피했는데,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상관이 주위를 돌아보더니 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어제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 난 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 내게도 북에 부모가 있다. 너를 고향의 네 부모에게로 보내주고 싶다. 지금 바로 도망쳐라." 그 상관의 도움으로 그는 추격해 오는 국군을 향해 달려가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이 약속을 쉽게 어긴다면,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을 우습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오해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기로 한 것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27절)
스웨덴의 한 동물학자는 "개를 보고 웃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웃는 얼굴을 보고 호감을 갖는 것은 사람의 기분이고, 웃으면 이가 보이기 때문에 개는 기분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내미는 것은 공격의 표현"이라는 개의 상식을 계산에 넣지 않고 내 본위로 판단하고 행동하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옳고 진리를 따른다 할지라도, 나의 말이나 행동을 사람들이 오해하게 된다면 결코 주님의 칭찬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방인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오해를 받으면 복음이 막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것입니다. 27절에서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한 세겔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적'에 관심 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의도'에 관심을 두어야만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의도는 "내 것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자랑하지 말라" "감사하라" 그리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하나님 뜻에 동참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사다리를 올라가는 성도로서 부끄러움 없는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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