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12, 2012

“죽이는 마음과 죽는 마음” (3/30/2003)

본문 : 요한복음 11:45~53
(45)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46)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47)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I. 서론
종이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두 면을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이를 뒤집는 일은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뒤집기 전에는 반대쪽에 있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우물안 개구리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다른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편협하고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밖에 나가보지 못하고 우물 안에만 있는 개구리는 우물 밖에 무한히 넓고 밝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물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II. 본론
1. 천국과 지옥
이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차원들이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빛의 차원과 어두움의 차원, 위로 올라가는 차원과 아래로 내려가는 차원이 있습니다. 빛의 차원, 위로 올라가는 차원은 천국이고, 어두움의 차원, 아래로 내려가는 차원은 지옥입니다. 출발지점에 있을 때에는 그 두 차원 사이의 차이가 없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사이가 점점 더 벌어져서, 나중에는 서로 교통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사람의 마음에도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빛을 좋아하고 빛을 향해서 움직이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빛을 싫어하고 오히려 어두움을 향해서 움직이려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마음을 바꾸는 것이, 마치 종이를 뒤집는 것처럼 아주 쉽다고 이야기합니다. 우스운 소리로, “여자의 마음은 미풍에도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고 하고, “남자의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흔드는 개꼬리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지옥을 향해서 가던 마음이 방향을 바꾸어 천국을 향해 가는 것, 이것은 마치 종이 한 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입니다. 그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결심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도 이미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보려고 하면, 얼마나 더 힘드는지! 마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무덤으로부터 부활시키는 사건이 있은 직후에, 유대인들의 마음이 확실히 두 방향으로 갈라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스스로 죽으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는 아래로, 어두움을 향해 내려가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빛을 향해 위로 올라가는 마음입니다.

먼저, 2. 죽이는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살인죄를 범하였으므로 당연히 재판을 받고 감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본문 50절 말씀에 보면, 그 해에 대제사장이었던,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를 주관하였던 가야바라는 사람이, 예수를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를 죽여도 괜찮다는 의견을 말하였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그러나 실상은, 로마 당국과 야합하여 부귀와 권세를 누리고 있는 소수의 지배자들의 욕심을 위해 그런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정치적으로 희생제물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은 그럴듯하고 명분은 국가나 민족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잘 들여다보면, 부와 권세를 누리는 소수의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해 애매한 사람의 재산이나 목숨을 빼앗는, 아주 파렴치한 행동입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일본인을 돼지우리에 넣었더니 돼지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있더랍니다. 중국인을 넣었더니 돼지들과 함께 잘 어울려 지내더랍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을 넣었더니 돼지들이 소리지르며 다 도망가버리더랍니다.
이런 마음이 다만 정치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자기의 편안함을 위해 아내를 폭행한다든지, 아내가 자기 욕심을 위해 남편을 못살게 굴면 그것도 “죽이는 마음”에 해당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보모에게 이러한 “죽이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이러한 “죽이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살기 위하여 남을 죽이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마음 속에 죽음 즉 지옥을 맛보게 됩니다. 그의 주변이 온통 지옥처럼 변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루어졌던 것처럼....

그러면, 3. 죽는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내 이름으로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작년에 어떤 한국인 청년이 일본에 여행 갔다가 지하철 역에서 술취한 일본인을 구해주고 자신은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온 일본이 그의 죽음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칭찬으로 끝났습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그렇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얻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영접하실 것이고, 상급도 주실 것입니다.
본문 52절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이름으로 그 일을 하였으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쓸모 없던 인간들을 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그 일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주셨기 때문에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구원, 영생의 축복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 나라로 승천하시고, 온 우주 만물이 그의 발아래 굴복하는 최고의 영광을 받게 되셨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에게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남편이 아내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듯이 하면, 아내가 남편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듯이 살면 그들 사이에 천국이 임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자녀가 부모를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살면 그 집안이 바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서로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기를 기뻐하면, 그 공동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를 기뻐하는 그 사람 자신의 심령 속에 반드시 생명을 즉 천국을 맛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죽는 마음”의 표상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절대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또 무엇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거는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표준새번역)”

III. 결론
인간의 본성은 “내가 살고자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의 본성은 “남을 살리고자 내가 죽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천국의 시민이 되었다면, 우리들이 바로 그 “죽는 마음”을 간직하고 또한 삶 속에 실천해야만 할 것입니다! “죽이는 마음”에서 “죽는 마음”으로 바뀌어야만 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 “죽는 마음”을 날마다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천국이 여러분 각자의 심령 속에 이루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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