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19:1-10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I. 서론
여러분 중에는 ‘그레이하운드’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맨하탄 42가에 가면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는데, 버스 옆에 보면 날씬한 모습으로 달려가는 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개의 종류가 바로
‘그레이하운드’입니다.
미국의 어느 지방에서는 ‘그레이하운드 달리기 시합’을 하면서 돈내기를 한다고 합니다. 미국 남부의 어느
마을에서 이 경기를 하다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소개합니다. 원래는 경기장 안에 토끼 한 마리를 넣어 도망가게 하고 개들이 그 토끼를 좇아가서
먼저 잡으면 우승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토끼를 가지고 하면 공정하게 경기를 운영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전기 장치로 움직이는 가짜
토끼를 만들어서 시합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가 시작되어 개들이 그 가짜 토끼를 잡으려고 달려가는데, 갑자기 전기
합선이 일어나서 토끼가 순식간에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토끼가 사라지자, 개들은 방향 감각을 잃고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리는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두 마리는 정신없이 돌진하다가 벽에 부딪혀서 갈비뼈가 부러졌으며, 어떤 개들은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빙 돌았고, 또 어떤
개들은 관중석으로 들어가 난장판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저는 우리 인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선택한 토끼를 좇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명예를, 또 어떤 사람은 권세를
좇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쟁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취감은 오래 되지 않아서 갑자기 사라져 버립니다. 그 토끼를 붙잡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질 줄로 알았는데, 그렇게 되지를 않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짧은 인생입니다.
II. 본론
1. 세상을
얻은 자
오늘 본문에 보면, 삭개오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였고 부자였습니다. ‘세리’라는 것은 일반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직업이었는데, 오늘날의 개념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나안 땅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정부가 직접
세금을 거두게 되면 반항이 일어났기 때문에, 세금 징수 대리권을 선수금을 받고 그 지방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돈을 주고 세금징수권을 산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대중들로부터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것입니다.
좋은 지역은 비싸게
팔리고, 가난한 지역은 싸게 팔리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라고 해서 다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세리인 동시에 부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주 좋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일에 있어서
삭개오는 정말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마음속에 만족함이 없고 행복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여행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여행을 떠난 첫날에는 가지고 간 돈이 제법 있는지라, 좋은 여관에 들어갔어도 불안하여 문을 이중 삼중으로 잠그고,
그래도 불안하여 돌아가면서 보초를 섰는데, 돌아올 때에는 돈이 다 떨어져서 아주 허름한 여인숙에 자면서도 문을 다 열어놓고 코를 골며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삼성그룹을 세웠던 이병철 회장은 한국의 최고 부자로서의 영광과 권세를 누렸지만,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할 때
미국에 와서, “내 생명을 1년 연장시켜준다면 내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아무도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삭개오의 키가 작았고,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하는 사람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등감과 소외감으로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세상을 얻은
자였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이렇게 세상을 얻은 자였던 삭개오가 갑자기 2. 세상을 버린 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그 권리를 위해 그토록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동족들로부터 얼마나
욕을 들으면서도 그토록 열심히 모은 돈이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삭개오는 불가능한 그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었다면 4배로 갚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소유한 모든 재물은 다 동족들로부터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4배로 갚는다고 하면, 그에게는 재물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빚을 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결심하고 예수님께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삭개오가 잃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재물입니다. 잠시 기쁨을 주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괴로움과 불안감을 더 많이 주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삭개오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자기 재산 절반을 주고도 1년을 더 연장시키지 못하는 생명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아무 값도 받지 않고 선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 영생의 선물은, 이 세상으로부터 지워진 무거운 짐을 오히려 축복으로 만들어 줍니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변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소외당하던 삭개오를 칭송 받는 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선물을 예수님으로부터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삭개오가 만났던 그 예수님을 여러분도 만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3. 예수님은 어떤 분이기에? 삭개오를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본문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분명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는 1) 우러러보시는 예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가진 자가, 조금 더 높다고 생각하는 자가 조금 덜 가진 자 또는 조금 더 낮다고 생각하는 자를
무시하고 경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인간을 대하십니다. 하늘의 기준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건강한 자나 병든 자나, 죄인이나 의인이나 다 똑같이 귀하게
취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천대하던 삭개오를 예수님은 가장 귀한 존재로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우주 만물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열등감과 소외감으로 가득찬 보잘것없는 삭개오에게 오셔서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8절은 예수님의 겸손이 어느 정도의 차원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오셔서 여러분을 우러러보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자기 고집의 나무, 자기 욕심과 죄악의 나무, 또는 절망과 좌절의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여러분보다 더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여러분에게 소리치고 계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서, 여러분도 낮은
곳으로 내려와 그 분을 만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2) 죄인의 집에 머무시는 예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
중에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거룩하게 열심히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율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너무나 거룩하고 깨끗하였기 때문에, 세리 또는 창녀들과 같은 죄인들과는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삭개오를 경멸하고 저주하면서
소외시켰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거룩하고 깨끗한 자들만 구원하신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기준에 맞는다고 해도, 그것은 스스로 착각하는 것이요
교만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죄인들을 용납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30절부터
32절에,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바난하였을 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고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 하나님을 떠났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몰랐으며,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방향으로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갔던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머무르시면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3)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시고 또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산과 들로 헤매는 목자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발견하기 위하여 온 집안을 쓸면서 열심히 찾는 여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열심히 찾고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III. 결론
이 예수님을
삭개오가 만났습니다. 참된 메시야 즉 구원주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분명히 찾았기 때문에 삭개오가 변화될 수 있었고 또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온 집안에 구원이 임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우러러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올라타고 있는 세상의 문제들로부터 속히 내려오라고 소리치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직접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다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머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주님을 거부하던 여러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예수님이 와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분이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여러분의 심령의 문 밖에서 지금도 두들기면서 외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지금 속히 문을 여시기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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