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3, 2012

성전건축(3)--“번제단에서 배우라!” (2/22/2004)

-No Video-

본문 : 이사야 1:11~20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19)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학교선생과 청소부와 정치인이 동시에 죽어서 베드로가 지키고 있는 천국문 앞으로 갔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너희가 이 천국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내가 하는 한 가지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첫 번째로 학교 선생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빙산과 부딪혀서 바다레 침몰된 최대의 영국 여객선 이름이 무엇이냐?” 선생님은 자신 있게 “타이타닉호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즉시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두 번째로 청소부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이 몇 명이었느냐?” 청소부는 망설이다가, “1,750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대답을 듣고 생각하던 베드로는 자기도 그 숫자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너도 문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정치인이 베드로 앞으로 나왔는데, “너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대보아라.” 그랬답니다.
어떤 집에 초청을 받았다면 대문으로 들어갈뿐만 아니라, 집 안까지 환영받아야만 합니다. 문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담 밖에 있다든지, 안마당까지는 들어갔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초청받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국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초청하셨지만, 반드시 천국문 안으로 들어가 주님의 환영을 받게까지 되어야만 그 초청이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I.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더니
지난주에 “울타리를 세워라!”라는 제목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 울타리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여인들의 뜰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전 안에는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의인들만이 아니라 죄인들이나 사기꾼들도 들어옵니다. 높은 사람이든지 낮은 사람이든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원하기만 하면 아무 조건 없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교회가 구원의 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교회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오직 그 이유만으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요 착각입니다.
아무튼, 울타리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과는 뭔가 다른 느낌을 갖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기간 동안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 있는 성소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뜰에 머물러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더 긴밀하게 교제하는 일이나,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변화되어가는 일이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반드시 성소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II. 성소에 들어가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조건이 있습니다.
성소 앞에 있는 번제단에 제물을 드림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이전인 구약시대에는 오직 제사장만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고싶어하고 말씀에 순종하여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쁜 소식이 하늘로부터 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로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되었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이라 하였고, 히브리서 10장 10절에서는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증거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말씀하듯이, 이제는 누구든지 제사장이 되어 직접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III. 성전을 온전하게 세우려면 번제단에서 배우라! (자기 희생)
그러나 본문 11절에서 증거하듯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헛된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번제물을 바치게 하신 목적이 변질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시면서 하님께서 한탄하시는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가 13절부터 15절에 기록하였습니다.
번제물이란 자기를 대신하여 동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번제물은 ‘자기 희생’을 깨닫도록 보여주기 위한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마음을 드리지 않고 동물만 제물로 드리게 될 때, 그 제물은 헛된 제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헛된 제물을 드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진실된 마음을 드리지 않고 그저 물질만 드린다든지, 예수님만 제물 삼아 바치고 본인은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계속 죄를 짓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헛된 제물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함께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하는 것처럼, 내 마음을 십자가에 드려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이 됩니다. 십자가는 자기 희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증거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이 되기까지 무한히 낮아지신 것 자체가 최고의 희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으시기까지 희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나도 희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희생할 때 하나님께 대한 나의 사랑이 증거됩니다! 그리고 18절 말씀처럼 우리의 죄성이 해결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희생을 더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을 죽일 때 마태복음 16장 25절 말씀처럼 주님이 영원토록 살려주시고,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처럼 그리고 오늘 본문 19절 말씀처럼 성도들의 삶을 풍성케 하십니다.
어떤 목사님과 사모님이 여러 해 동안 연애를 하다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훌륭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신혼여행을 가는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하여 거의 매일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답니다. 자녀들을 낳기 전에도 싸우고, 낳고 나서도 싸우고, 나가면서 싸우고 들어가면서 싸우고, 아무튼 열심히 지긋지긋할 정도로 싸웠답니다. 그렇게 10여년을 싸우다가, 어느 날 신앙상담을 하는 중에 그 원인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목사님은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정성으로 보약 달여주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나중에 장가가면 아내가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의 가정은 어머니가 몸이 허약하여 아버지가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고 심지어는 밥과 설거지도 아버지가 하였습니다. 사모님은 나중에 시집가면 자기 남편이 당연히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둘 다 정 반대였습니다. 그러니 상대방이 희생해 주지 않는 것이 싫어서 매일 부부싸움을 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본을 보이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희생해야 합니까? 본문 16절과 17절에서 말씀하듯이, 그리고 마가복음 14장 7절에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물질이나 혼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나의 물질과 혼과 영을 희생시킬 때 우리는 비로소 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희생은 하지 않고, “나는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왜 변치 않나?” “하나님이 왜 내게는 안 나타나시나?”라고 불평한다면, 그런 사람은 성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뜰에만 머물러 있다가 아까운 인생을 다 허비하고 주님 앞에서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성전의 울타리 안에 있음을 먼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번제단을 통과해 성소로 들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아, 여러분 자신을 조금씩 더 희생함으로써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더 깊은 교제를 나누시고, 날마다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시며,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