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출애굽기 20:1~3,18~26 10/22/2006
(1)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18)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1)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23)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24)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25)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주님 가르치신 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원어 성경에 보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가 수동태의 동사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수동태의 동사 뒤에는 행위자가 따라오는 것이 정상이지만, 기도문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거룩'이라는 말은 원래 '종교적인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데, '거룩한, 신성한'이라는 의미로 발전되었고, 동사는 '구별되다. 성별되다.'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구별되심, 성별되심이 마땅하신 분'이라는 뜻이며, 십계명에서도 제1,2계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이라는 말은 모든 본성과 속성을 대표할 때 쓰이며, '권세'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십계명에서는 제3계명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모세와 백성의 모습 속에서 그들이 세 가지 고백을 하나님께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고백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비로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가 성립될 것입니다.
1. 첫째는 "관계를 성별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이 "구별 또는 성별되시게 함"이라는 의미라면, 성도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세상 죄를 그대로 가지고는 가까이 갈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상 사람과의 관계처럼 가볍게 여긴다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가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과학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어떤 연구원이 열심히 연구를 마치고 연구 결과물인 화학 약품을 병에 담아 두었습니다. 그 화학 약품은 몹시 위험한 것이어서 연구원은 병에다 D-A-N-G-E-R 이라고 써 붙여 놓았습니다. DANGER는 위험하니 만지지 말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사탕이나, 쵸콜렛 같은 단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이 그 연구실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연구실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DANGER 라고 써놓은 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단 것을 너무 좋아한 그 사람은 D-A-N-G-E-R이라는 글을 보고서 영어 식으로 읽지 않고 독일어 식 발음 나는 대로 "단거"라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병에 든 위험한 약품을 단숨에 들이키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멋대로 부르고 해석한다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 멋대로 정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능력의 종"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요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역전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항상 자비와 은혜가 넘치시는 분이었지만, 성전을 청소한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아버지의 거룩하심 해치는 것은 결코 용서치 않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죄를 드러내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2. 둘째로, "권위를 인정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성도가 얼마만큼 발전된 신앙 위치에 있는가?"는 "그가 하나님의 권위를 얼마만큼 인정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18-19절)
핸드폰 가게를 운영하는 분들이 하는 이여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일 비싼 것으로 주세요"라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애인에게 줄 선물이랍니다. 그리고 "제일 싼 것으로 주세요"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이 부모님에게 줄 선물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부모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고백이 거짓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부르짖는다면, 그 기도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사무엘 선지자 시대에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들이 있어서 제사를 드릴 때마다 수종을 들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들 중 가장 좋은 것을 자신들이 먼저 취하고 남은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을 별로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장 29절에 보면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최고로 인정하고 또한 말씀대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요한복음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3. 셋째로,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약속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을 할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베드로는 죽기까지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맹세하였지만, 주님이 보시는 앞에서 세 번 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입으로 하였던 그 맹세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기에 야고보서에서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과정을 지식(knowledge), 수용(acceptance), 훈련(practice)의 세 가지 원리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이치에 맞으면 납득을 합니다. 마음에서부터 동의를 하고 수락합니다. 그 다음에는 익숙해질 때까지 훈련을 합니다. 행동이 없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훈련으로 인한 행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기 위해서도 역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꾸준히 실천해야 주님의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없이 순종하는 연습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말을 줄이고, 묵묵히 실천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다 준행하였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할 때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세 가지 고백을 진실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성별하겠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최고로 인정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기도가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시며 응답하시는 기도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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