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12:46~50 9/18/2005
(46)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48)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한자어 숙어에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도 있다’는 말입니다. 영어에서는 ‘We meet only to part.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헤어짐은 항상 슬픈 일입니다. 누구와의 이별이 가장 슬플까요? 역시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이 아닐까요?
보스톤에 사는 사업가 김씨가 후로리다에 출장을 가서 자기 아내에게 e-mail을 보냈는데 주소를 잘못 치는 바람에 엉뚱한 사람에게 전달되었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며칠 전에 목사 남편을 잃고 슬픔에 잠긴 사모님이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자기에게 온 e-mail을 열어서 읽어보다가 기절해 버렸습니다. e-mail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여보, 나는 무사히 도착했소. 그런데 이 아래는 너무 뜨거워서 견디기가 너무 힘들구려...’
1. 세상의 가족은 헤어지기 싫은 공동체입니다.
어떤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여러 가지를 그려보았지만, 그려놓고 나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오랜만에 돌아온 남편에게 대접할 음식을 만들기 위하여 앞치마를 두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아내와 식탁에 둘러앉아 아버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는 가족을 보고 있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한 가족이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불행과 슬픔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지난 달에도 남북한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사연은 다 다르지만 오랫동안 소식도 모르고 헤어져 사는 불행 속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리는 장면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다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지 못하면서 헤어져야만 할 때 그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의 가족은 다시 만나도 반드시 그리고 영원히 헤어질 운명에 있습니다. 죽음이 모든 관계를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은 허망한 것입니다.
2. 그런데 50절 말씀에 보니, ‘주님의 가족’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가족과 같은 점은 헤어지는 불행과 다시 만나는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육신의 죽음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주님의 가족의 ‘다시 만남’은 영원한 만남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헤어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가족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특히 여러분의 가족이 모두 ‘주님의 가족’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즉 그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가족’이 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런데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육정으로(by will of flesh) 또는 사람의 뜻으로(will of man)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NO!’입니다. 48절에 보면 ‘누가 나의 모친이과 나의 동생이냐?’고 말씀하시면서,
3. 50절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나의 가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가족이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들 모두에 YES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첫째로 ‘나는 아버지의 자녀인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나는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고, 아버지께 완전한 헌신을 드린다는 것이며 아버지의 말씀에 완전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는 아버지의 뜻을 아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깨우치고 하늘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의 영적 대가들은 ‘하나님의 지혜 한 조각을 얻기 위해서라면 40리를 걸어가도 행복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는지요?
셋째로,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말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저 그의 이름만 부르는 것으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분명해진 하나님의 뜻을 말과 행함으로 실천해야만 합니다. 말과 생각으로 끝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을 증거 받지 못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르지만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간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그리고 믿는다고 하면서 말과 행동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르게 살아간 사람이 있다면, 심판의 때에 누가 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고슴도치의 사랑에 딜레마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자기 가족을 아무리 사랑해도 포옹을 해줄 수 없답니다. 포옹하면 서로 가시가 피부를 찌르기 때문에, 꼭 껴안을수록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의 가시, 내 뜻대로 살려는 욕심의 가시, 말로만 거룩하고 속으로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가시, 헌신과 순종 없는 불평불만과 원망의 가시가 있는 한, 그러한 사람은 주님의 가족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까이 하면 할수록 상대방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천국사다리를 올라가는 성도가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의 가족 되지 못하면 천국사다리도 올라갈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가족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습니까? 믿음의 형제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습니까? 주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고 노력하는 성도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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