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16, 2012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2006-6-25]



본문 : 누가복음 10:25~37
(25)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사랑(Agape)에 대해 고린도전서 13장 4절과 5절은 ‘오래 참음/온유함/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음/자랑하지 않음/교만하지 않음/무례히 행치 않음'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 이어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무조건 손해보고 살라는 말씀인가요?
‘자기 유익을 구함’의 원어적 의미는 영어로 표현할 때 'seek his/her own'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것을 열심히 추구하고 찾아다니는' 모습입니다.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지만, 잘못된 열심이고, 잘못된 삶의 태도입니다. 만약에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Agape)이 없고, 천국에 넉넉하게 들어가지 못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세 가지 부류의 사랑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째는 강도의 사랑입니다.
강도에게도 사랑이 있을까요?
한국에서 얼마 전에 '마포 발바리'라는 성폭행 강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경찰에 붙잡힌 범인은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 위해 돈이 필요해서 강도 짓을 하였다'고 하였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경찰에게 쫓기게 되자 붙잡힐까봐 성당에 들어가서 매일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도 강도가 등장하는데, '강도'라는 말은 '자기 유익 위해 남을 희생시키고 강제로 빼앗는 자'입니다. 강도에게도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랑은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심일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Agape)이 없습니다.
한국의 부산에서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기 아내를 네 번 씩이나 살해하려고 하였던 어떤 비정한 남편이 붙잡혔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밤중에 드라이브 나가자고 속이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동족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형제와도 기꺼이 원수가 되며, 부부끼리도 서로 강탈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강도'가 된다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2. 둘째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사랑입니다.
그들 역시 '자기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도 만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자 피해 갔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손해 보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Agape)이 없습니다.
31절과 32에 나타난 제사장과 레위인의 태도를 볼 때,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체는 만지지 말라'는 계명(민수기 6:6)을 잘 지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강도만난 자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소리치지 않았을까요?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은 잘 지켰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정녕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사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렇게 못 본 척 하면서 지나갈 수 있었을까요? 만약에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제2차 대전 말기에, 독일군이 온 세계를 점령 때,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저항운동자들이 감옥에서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이 전혀 없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처형당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되어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저항운동에는 관심도 없다. 나는 그저 돌아다니며 장사한 것뿐인데 왜 나를 죽이는가."라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저항운동자가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죽어 마땅하오.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참하게 피를 흘리며 싸우는데 아무 일도 안 했으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잘못이오."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오직 자신의 복에만 관심을 두고, 믿음의 형제 자매들 그리고 이웃에게는 무관심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3. 셋째는 사마리아인의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어떻게 그러한 상황에서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줄 수 있었을까요?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평소에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이웃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Agape)이 분명하게 있다고 주님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에게는 세 가지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33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자의 눈에는 강도 만난 자 즉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 사랑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눈 앞에 있어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둘째는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마음입니다.(34절) 눈으로 보았다 해도 멀리 피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만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기쁘게 희생하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34-35절)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시간과 힘과 물질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율법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라고 질문하고 또한 스스로 대답하게 되었을 때(27절), 주님은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15:1-2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주님의 사랑을 무한히 받은 우리들도 이 사마리아인처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평상시 신앙 생활 속에서 늘 불쌍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며, 또한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게 될 때 기쁜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합시다. 실천하기 힘들면 연습을 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과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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