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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9:46~56
(46)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49)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51)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한국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마 ‘1등 해라!’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들만 들볶지 말고,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서 1등 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사랑’이 있는 믿음을 가지면 누구나 ‘1등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흔히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그 15가지 중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는 정의입니다.
가장 힘든 것이어서 첫 번째로 꼽았을까요? 아니면 가장 쉬운 것이라서 첫 번째로 꼽았을까요?
1. 사랑은 오래 참는 것
그 정의에 의하면, 사랑(Agape)이 있으면 오래 참는 열매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 참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지만, ‘사랑합니다’라고 말은 하면서 오래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다’ 또는 ‘거짓된 사랑’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래 참음’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makro-thumeo’인데, ‘멀다’라는 단어와 ‘욕정, 격노,
분노’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그런데 ‘오래’라는 말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 참으면 ‘오래 참았다’고 인정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격이 느긋한 사람은 비교적 상당히 긴 기간동안 참을 수 있겠지만, 성격이 급한 사람은 아마 1분이 1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참는
능력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 다를 것이고, 환경의 차이에 의해서도 다르게 정해질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오래 참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어떤 사람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한
번 더 참는다면’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사람에게는 ‘오래 참은 것’이 될 것입니다.
정말로
참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자랑거리가 있을 때, 내가 억울하여 변명하고 싶을 때, 남의 비밀을 알고 있을 때, 남을 흉보고 싶을 때,
남들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싶을 때,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쾌락이 우리를 유혹할 때,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할 때, 우리의 손과 발은 참지
못합니다. 그러한 때에 참지 않고 터뜨리면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그렇게 디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게 되고, 믿음의 형제들에게 큰 피해가 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 자신은 ‘사랑이 없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고, 결국 나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 되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오늘 본문 49절에 보니, 제자들 중에 요한이 참지 못하고 주님께 와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금하지 말라(50절)’고 대답하셨습니다. 곧 이어서 야고보와 요한이 와서 다시 불평을 할 때(53-54절) 주님은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55절). 그들에게 주님을 향한 믿음은 있었겠지만 사랑은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46절에서 ‘누가 크냐?’고 싸웠던 제자들은
모두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보면, 그러하였던 사도 요한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을 이끌고 있을 때, 장군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 중에 가장 성미가
급한 Stanton 장군이 대통력에게 와서 동료 장군들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듣고 있던 링컨 대통령이, ‘종이에 자세하게
적어오라’고 말하자, 그는 신이 나서 돌아가 장군들 각자의 단점들과 문제들을 자세히 기록해 왔는데 무려 10장이나 되었습니다. 그 종이를 받아든
링컨 대통령이 Stanton 장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내가 이것을 자세히 읽을까요?’라고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떨구고 그 종이를 자기
손으로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오래 참는 성도들이 되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2. 그런데, 여러분은
오래 참을 수 있습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쉽게 한 번 더 참을 수 있습니까?
참는 힘이 아이가 큽니까 아니면 어른이 큽니까?
만약에 어른에게 참을성이 더 많다면,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믿음으로 참는 힘도 더 커져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늙으면 다시 아이가
된다’고 하면서 변명하려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억지로라도 참으면 될까요? 억지로 참으면 병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오래 참을 수 있을까요?
3.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오래 참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오래 참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오래 참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탄생할 때부터 천국비밀을 아셨지만 공생애를 시작할 때까지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혀진 것을 매년 유월절마다 보셨지만 마지막
유월절까지 참으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할 제자에게도 끝까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할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여러 차례 주셨습니다. 억울한 재판을 당할 때에도 자신을 위해서는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침 뱉음과 조롱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빌어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도 오래 참고
계십니다. 행하지 않을 것을 행하는 죄를 범하고 행해야 할 것을 행치 않는 죄를 범할 때에도 주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시고
두 팔을 벌려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그 주님을 닮아간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우리도 한 번 더 참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억지로가 아니라 주님의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믿습니다‘라고 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도 주님처럼 참겠습니다’ ‘주님처럼 참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오래 참는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열매가 여러분을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천국 확장에 쓰임
받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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