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27:1~10 9/19/2004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3)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 보면,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다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하여, 내 이웃이 누구인지 찾기 전에 강도 만난 자들에게 이웃이 되어 줌으로써 영생을 얻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영생을 주는 구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공생애 사실 때 12제자들이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 12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영생을 얻었을까요?
그는 주님과 함께 사역하는 동안 재정 문제를 담당하였는데, 공동체를 이루어 갈 때 가장 힘든 일들 중 하나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고, 그 어려운 일을 끝까지 감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였을까요? 인간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랬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 두 달도 아니고 3년 이상이나 동고동락 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아가페적인 사랑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구원 얻은 것이 기쁘고 감사하여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헌신한 후에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랑의 정의’가 기록되어 있는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라 하였는데 유다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 하였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라 하였는데 유다는 그 반대로 행하였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유다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 하였는데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유다는 사랑의 실패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부정적인 각도에서 계속 비판하였고, 불평불만을 쌓아가다가 결국에는 노예 한 사람의 값에 해당하는 은 30에 예수님을 적에게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 뉘우친 후에 그 돈을 도로 갖다 주고자 하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어버립니다.
여러분은 그가 왜 예수님을 배반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그의 운명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탄이 그에게 강제로 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나타내게 하려고 그를 일부러 배반하였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스스로 목매어 죽는 모습을 근거로 볼 때, ‘자기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이 언제 가룟 유다처럼 사랑의 실패자가 될까요?
I. 첫째로 가치 평가가 잘못될 때 가룟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에 대해 은 30보다도 못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배반을 하고 적에게 넘겨줄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예수님을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경하였다면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값싸게 여긴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게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자, 그는 스스로 살 가치가 없다고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누구든지 스스로를 무시하고 경멸하면 좌절감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깊어지면 우울증에 빠지고, 헤어나지 못하면 정신병자가 됩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볼 때 ‘천하보다 귀하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독생자의 목숨과 바꾸어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를 ‘내 목숨보다 귀하다’고 여깁니다. 그러기에 무조건적으로 주는 아가페적 사랑이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II. 둘째로 이웃이 되어줄 공동체가 없을 때 영생을 못 얻을 수 있습니다.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은 후에, 그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 문제의 당사자인 예수께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때 예수님은 아직 살아계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가서 고백하지 못한 것은, 몸은 같이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는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결정하고 혼자서 가버렸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공동체가 될 때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한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그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팔을 벌려 환영하시지만, 각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들기시지만, 본인이 마음 문을 열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당신이 만약 혼자서 무인도에 가게 되었는데 가장 필요한 것 세 가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그르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더니, 첫째는 컴퓨터, 둘째는 인터넷, 셋째는 핸드폰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서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통화할 친구들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III. 셋째로 약속의 때를 기다리지 못할 때 영생을 못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유다가,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을 받을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세례요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올 것이라고 증거 하였고,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4절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시편 57편 7절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부르짖었던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라는 외침이 가룟 유다의 외침이 되었다면 그는 영생을 얻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결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외침이 되는 한, 여러분은 반드시 영생을 얻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영생을 확실하게 얻는 아가페적 사랑의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성도들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 만큼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넘치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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