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빌레몬서 1:8~21 9/12/2004
(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9)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13)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15)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18)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사람들 입으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말 중에 하나는 ‘사랑’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그 말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겠습니까?
인도 캘커타 지역의 빈민가에 있는 ‘사랑의 집’에서 테레사 수녀가 봉사하고 있을 때, 그 집에 설탕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마을에 전해졌습니다. 마을에 살던 한 소년이 이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어머니, 앞으로 사흘 동안 나에게 설탕을 주지 마시고 모아서 나에게 주세요.’ 그리고 사흘 후에 그 소년은 작은 병에 들어 있는 설탕을 들고 ‘사랑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사랑에 대한 의미’를 묻는 신문 기자들에게 테레사 수녀는 ‘사랑이란 한 소년이 들고 온 3일분의 설탕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증거함으로써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가 기록한 요한 1,2,3서를 보면 사랑이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에 비하여,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복음 전파를 위한 열정과 헌신에 있어서 아무도 따라갈 자가 없었습니다.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많은 교회들을 세웠고, 결국에는 로마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말년에 가서는 사랑이 최고임을 깨닫고 또한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3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사랑 없는 믿음을 경험한 결과로 얻은 진리였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장 11절부터 13절에는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 없는 믿음은 미성숙한 믿음이고, 사랑 있는 믿음이 될 때 비로소 성숙된 믿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러한 깨달음의 모습이 빌레몬서에서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울자 우유를 주었습니다. 그래도 그치지 않자 과자를 주기도 하고 장난감을 주어 달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화가 나서 엉덩이를 때려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아기의 발바닥에 가시가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시를 빼어 주었더니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더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사랑의 모습일까요? 자기 생각대로 우유와 과자와 장난감을 주면서 강제로 울음을 그치게 하는 모습일까요? 아니면 아기를 잘 살펴봄으로써 그 발에 박힌 가시를 빼어주는 모습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감옥에 갇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옥 안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상당한 손해 끼치고 도망친 종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았지만, 과거에 죄를 지었던 일들에 그에게 큰 멍에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가시처럼 오네시모의 마음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괴롭히고 있는 그 멍에와 가시를 해결해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의 성숙한 형제사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8절과 9절은 사랑을 인하여 그렇게 하였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I. 바울은 사랑을 인하여 빌레몬의 승락을 간구하였습니다.
바울은 얼마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명령을 하더라도, 신앙의 선배로서 그리고 옳은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책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자신이 신앙의 선배라는 이유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이유로 형제들에게 명령하듯 말하고, 강제로 이것저것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는 용납될지 몰라도, 사랑으로는 용납되지 못할 행동입니다.
Hermann Hesse가 쓴 'Augustus'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아들을 낳고 크게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노인이 들어와 아기를 보고, 한 가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소원을 빌었고, ‘존경받는 자’라는 뜻의 Augustus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아이는 자라면서 정말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른이 되면서 교만해졌고 결국 타락하여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때 노인이 나타나 한 번 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Augustus는 ‘내가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는 다시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의 원하는 바를 정중하게 요청하는 자세가 될 때, 다시 말하자면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자세가 될 때 비로소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II. 바울은 사랑을 인하여 형제로 영접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형제가 되었다고 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면, 형제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에, 그리고 주인과 종업원 사이에 주님 안에서의 형제 관계가 성립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상대방을 형제로 영접할 때, 즉 하나님의 가족이 될 때 비로고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I. 바울은 사랑을 인하여 더 행하도록 믿어주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명령하듯이 말하였다면, 억지로 시켰다면, 의심하는 마음으로 따지듯이 강요하였다면, 비록 빌레몬이 그 명령을 실천하였다 하더라도, 자원하는 마음이나 기쁜 마음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준행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어느 주일학교 전도사가 ‘조용한 어린이 상’과 ‘성경 읽기 상’을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다 상을 받고 싶어서 열심히 하는데, 디모데라는 아이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상’을 만들어 디모데에게 매주 상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몇 주 지나지 않아 모든 상을 휩쓰는 아이로 변했다고 합니다.
더 행하도록 믿어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를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인하여 더 성숙된 믿음을 보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명령하기보다는 간구하는 자세를, 지배하기보다는 형제로 영접하는 자세를, 의심하기보다는 믿어주는 자세를 보여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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