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10, 2012

천국 복음 “앉은뱅이의 찬미” (1/27/2002)

본문 : 사도행전 3:1-10

(1)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I. 서론
무더운 한여름에 식료품을 파는 가게에서 물건을 나르던 한 종업원 청년이 더위에 지쳐 숨을 헐떡이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고기를 저장하는 냉동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이 청년의 눈에 띄었습니다. “냉동실은 얼마나 시원할까! 잠시 들어가서 더위를 식히자!” 그런데 청년이 들어가자마자 냉동실 문이 자동으로 닫혀버렸습니다. 안에서는 문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면서 벽을 두드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절망감이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청년은 주머니에서 연필과 종이를 꺼내어 유서를 썼습니다. “이제 완전한 절망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되어온다, 내 몸은 점점 얼음으로 변하고 있다. 조금 후면 꽁꽁 얼어붙어서 죽을 것이다.”
다음날 사람들은 그 냉동실에서 숨져있는 청년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냉동실은 며칠 전부터 고장이 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실내 온도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온도인 화씨 58도였으며, 산소도 충분하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죽어 있었습니다. 환경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그의 절망감이 그를 죽였던 것입니다.

II. 본론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1.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바로 그 청년과 같았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절망감이 가득 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발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절망감 때문에 성전 문앞을 떠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남들처럼 자기 발로 걷고 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 그것이 그의 최고 소원이었겠지만, 그것은 허망한 꿈에 불과하였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내밀어 구걸하여 생명을 겨우 유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하였겠지만, 이제는 아주 당연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모든 인간이 바로 이 앉은뱅이와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죄인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삶을 원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은 스스로 발견할 수 없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하루하루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구걸하듯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아닌데...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고민도 해보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사는 것이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살아갑니다.

2. 성전 미문과 사람들
그런데 문제는 그 앉은뱅이가 날마다 성전 앞까지 갔었다는 사실입니다. ‘미문’이란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 안뜰로 들어가는 입구였고, 그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앉은뱅이는 그 아름다운 문을 눈으로 바라볼 뿐,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들어가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또 문제가 있다면, 그를 날마다 데려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과 제자들을 만났든지, 아니면 적어도 여러 기적의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그 앉은뱅이를 예수님 앞으로 안내하지 않았고, 성전 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똑같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영생의 말씀이 매주일 쉬지 않고 선포되고 있고, 예배당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거부합니다. 세상의 양식을 구걸하며 하루하루 의미 없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들도 그들을 성전 안으로 데려가는 일에 게으릅니다. 자기만, 자기 가족만 구원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보니, 천국의 기쁜 소식이 그 앉은뱅이에게 임하였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하였던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말라있던 다리가 풀어지고 힘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여러분도 이 앉은뱅이처럼 천국 복음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천국복음의 주인공이 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본문에서 세 가지 교훈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1) 바라봄의 법칙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인생이 좌우됩니다. 돈을 바라보면 돈을 좇아가고, 명예를 바라보면 그 명예를 얻기 위해 인생을 투자하며, 권세를 바라보면 그것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이 앉은뱅이는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 손에서 떨어지는 돈이나 음식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이나 은혜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앞을 지나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남들이 갖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천국 복음을 받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며,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자세입니다.
역대 마라톤 선수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올림픽 경기에서 맨발로 뛰어 우승을 차지하였던 에디오피아의 ‘아베베’입니다. 그런데 그가 영웅으로 불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우승한 후에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후에 두 다리를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두 다리는 잃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건강한 두 팔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열심히 연습하여 장애인 올림픽에서 다시 우승을 하였던 것입니다. 없는 것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을 본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소망 없는 문제 투성이의 이 세상을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리고 그 영생을 주시겠다는 그 분의 약속을 바라보십니까? 지금 결정하십시오.
둘째로, 2) 하나님의 것을 받아야 합니다. 미련한 자의 눈에는 인간의 것을 받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지혜로운 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것이 더 소중하게 비쳐집니다. 미련한 자는 인간의 것을 받기를 좋아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것을 받기를 더 기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금이나 은과 같은 세상의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에게 참된 소망이 되고 참된 해결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것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은, 인간의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셋째로, 3)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또는 영웅의 이름을 찬미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능력이 없는 허망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과 영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앉은뱅이에서 일어난 그 사람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하나님을 찬미합시다. 그러면 여러분도 반드시 복음의 주인공이 되시고 영생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III. 결론
어릴 때 소경이 되어 평생토록 앞을 보지 못하였던 헬렌 켈러 여사가 쓴 글 가운데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첫 날에는 나를 가르쳐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 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우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 동안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성도 여러분, 헬렌 켈러의 평생 소원이었던 “3일 동안 보는 일”이 저와 여러분에게는 어떤 일입니까? 3일만이 아니라, 3주, 3달, 3년이라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강한 눈과 손과 발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헬렌 켈러는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였는데,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며 인생을 보내고 계십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것을 받고, 하나님을 찬미함으로써 여러분 모두가 천국 복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