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12, 2012

“나는 감사할 조건이 없다” (11/24/2002)

본문 : 마가복음 11:1~10

(1)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6)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8)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I. 서론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추수감사주일에, 지난 11월 19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하나를 소개합니다.
“삶에 새옹지마(塞翁之馬, The Horse of SaeOng)가 있듯이, 전라북도 무주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마을에도 그런 운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주 땅은 산의 점유율이 83%다. 살기에 좋은 환경이 못되는 곳이다. 자기 나이만큼 이곳에서 살았던 78세 된 김재환 할아버지는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마을만 낙후됐다’고 불평하며 공업단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만약 그게 잘 됐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고백한다.
한때는 주민 16만명이 살던 시절도 있었지만, 주민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3만명이 채 안 남았다. 사람들로부터 버려지고 천대받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을이 도시의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2001년 한해 277만명, 올해는 이미 310만명이나 찾아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주는 교통이 좋지 않은 산골짜기로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무주가 전국의 무대에 떠오른 것은 1997년 ‘반딧불이 축제’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축제를 기획하였던 김세웅(金世雄) 군수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 나름대로 무주 지역을 열심히 뒤지던 중, [천연기념물 322호 ‘반딧불이’ 서식보호지]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눈에 불똥이 튀었습니다. ‘무주의 모든 발전 전략을 여기서 잡자’며 신들린 듯이 기획을 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의외로 시큰둥했습니다. 개똥처럼 흔하다고 해서 개똥벌레였는데,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국내 언론사와 여행사에 자료를 배포하고, 군 직원들이 전국 각지에 파견돼 지하철역, 공항, 버스터미널에서 행사 전단지를 돌렸다. 이 반딧불이 축제에 35만명의 인파가 몰려 평균 2박3일간 머물렀다. 이때 약 40억원의 경영수익을 올렸다. 올해에는 70만명에 73억원의 경제파급효과를 낳았다. 그뿐만 아니라, 무주군은 󰡐반딧불이󰡑에 대한 상표권을 등록했다. 반딧불이의 디자인 5가지가 포함돼 있다. 반딧불이에 관한 한 독점적인 지적재산권을 확보한 것이다. 군 소재지의 거리에는 반딧불이 모형을 응용한 장터와 가로등이 세워졌다. 특히 가로등은 야밤의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처럼 빛을 발한다. 무주의 특산물에도 반딧불이 상표가 붙었다. 반딧불이 쌀, 반딧불이 마늘, 반딧불이 사과, 반딧불이 포도, 반딧불이 고추장, 반딧불이 된장 등이 외부로 출하되고 있는 중이다.
무주 토박이인 김홍식(67)씨는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청정 상태에서 소출된 무주 농산물은 판로가 좋고 시세도 좋다”며 “이제 오염 안 된 환경이 바로 돈이 되고 경쟁력이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사과 농사를 짓는 정건수(47)씨는 “다른 지역의 사과가 상자당 3만원쯤 할 때 반딧불이 사과는 10만원을 받는 등 전국에서 최고의 값으로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무주 군청의 건물 벽에는 [한국 속의 알프스 무주]라는 슬로건이 걸려있다. 거리에는 검은 아스팔트 대신 시골스러운 황토 벽돌이 깔렸다. 전선을 지하로 매설했다. 공중화장실은 세련되고, 야외운동장의 관중석 천장에는 등나무를 심어 덮었다. 소망이 없던 무주는 이제 한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관광 명소가 되었고, 그곳 주민들은 모든 도시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성도 여러분, 10여년 전에 무주에 살던 주민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 환경을 원망하였고,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겨우 10년이 지난 지금, 환경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고,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감사할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10년 전에도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볼 때,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떻습니까? 감사할 조건들이 많았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감사할 조건이 없다”고 하면서 한숨을 쉬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저도 “나는 감사할 조건이 없다”는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조건을 발견하였습니다.
II. 본론
첫째로, 만약에 내가 세상에 매여 있던 상태로부터 1. 풀림 받지 못하였다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을 한구석에 끈으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무엇 때문에 거기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 나귀와 같은 신세라면 어떨까요? 아마, 한숨쉬면서, 인생을 저주하고 신을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 나귀가 풀림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자 아무도 그것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내가 풀리고자 해서 풀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계획을 완성해 주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진리로 말미암는 자유인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세상의 허탄한 것에 매여 있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가 우리의 주인이었습니다. 그 주인은 우리를 영원한 사망으로 끌고갔습니다.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 인생인지, 누가 내 주인인지도 모르면서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영원한 사망의 끈으로부터 풀려났다는 사실입니다.
매여있던 것으로부터 풀려났다면, 우리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세상의 어떤 권세와 능력으로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볼 때, 세상의 매임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풀려나서, 조금이라도 더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라가게 되었다면, 그 한 가지 만으로도 감사의 조건이 충분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입니까? “예수님만이 나의 참된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풀려났고 점점 더 많이 풀려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내가 만일 지난 1년 동안 주님께 전혀 2. 쓰임 받지 못하였다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해도 됩니다.
다시 그 나귀 새끼를 생각해 봅시다. 그 나귀 새끼에게는 주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 나귀가 주인의 유익을 위하여 전혀 쓰임을 받지 못하였다면, 주인이 그 나귀 새끼를 어떻게 하였을까요? 입장을 바꿔서 그 나귀 새끼는 무슨 의미로 살아갈까요? 만약에 저와 여러분이 그 나귀 새끼와 같은 신세라면 어떻겠습니까? 아무 쓸모 없는 인생, 남들에게 부담만 안겨주는 인생을 살았다면, 감사할 조건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 나귀 새끼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았습니다. 아마, 그 동물이 말을 할 수만 있었다면, 최고의 기쁨과 감사로, 자신을 써주신 주님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하찮은 동물이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쓰임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영광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지난 1년 동안 어떠하였습니까?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크든지 작든지,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께 쓰임을 받았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하더라도, 나의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께 없어서는 안될 귀한 존재가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주님의 품안에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3. 견뎌 내지 못하였다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의하면, 그 나귀는 새끼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동물들 중에서 왜 나귀 새끼를 지정하였을까요? 거기에는 굉장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그 나귀 새끼처럼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무슨 능력이나 힘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 많아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경험이 없기에 주님이 쓰실 수 있는 것입니다.
베다니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3Km의 짧지 않은 거리입니다. 평탄한 길이 아니라 돌이 많은 비탈길입니다. 그런데 그 연약한 나귀 새끼가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가다가 힘들어서 쓰러졌다는 말이 있습니까? 분명히,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견딜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난 1년간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기업의 주인과 종업원으로서, 목사와 성도로서,,,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은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견뎠습니다. 스스로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III. 결론
성도 여러분, 사망의 권세로부터 풀어주신, 진리로 말미암아 점점 더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을 감사합시다.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고 견디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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