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12, 2012

“룻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10/26/2003)



본문 : 룻기 1:11~18
(11)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12)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찌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13)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14)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I. 환경의 시련 앞에서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돌아가는 평상시에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없지만, 환경의 시련이 다가오면 그 사람의 속마음이 쉽게 드러납니다. 원래 속마음이 좋았던 사람은 고난이 찾아와도 여전히 좋은 마음으로 대처하지만, 원래 속마음을 감추고 좋게 꾸미던 사람은 고난에 악한 마음으로 대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따라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 웹사이트에 재미있는 글이 실렸습니다. “바보 온달의 아내와 봉이 김선달의 아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나도 평상시에 고려 시대의 실제 인물이었던 바보 온달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흥미를 갖고 그 글을 읽었습니다.
온달은 온 나라에 바보로 소문나 있었고, 집안은 정말로 너무나 가난하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봉이 김선달은 1차 과거에는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하지는 못하는 몰락한 양반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아주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집안이라는 점에서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아내의 내조에 따라 인생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온달의 아내는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는 온달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고, 숨은 재능을 계발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을 역사에 기록되는 유명한 장군이 되게 하였고, 자신은 장군의 아내로서 백성들의 칭송을 얻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김선달의 아내는 남편의 무능함을 판단하고 비난하였으며, 자신은 남편의 출세를 통해 혜택을 누리기만을 고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김선달은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집을 떠난 후에 대동강변을 거닐다가 대동강 물을 팔아먹는 희대의 사기꾼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아내는 굉장한 사기꾼의 아내가 되었지요.

오늘 본문 룻기에는 II. 나오미의 며느리 오르바와 룻이 등장합니다.
나오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였던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습니다. 나오미는 순식간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과부가 된 두 며느리들에게 고향의 가족들에게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시어머니를 붙잡고 슬피 울었습니다. 14절에 보니까 그 두 며느리들이 똑같이 소리 높여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는 슬픔이 똑같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대하는 자세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오르바는 좀 더 편한 쪽으로 선택하여,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 고향의 부모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반면에 룻은 어려운 편을 선택하였고, 자신들이 당한 고난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시어머니의 생명을 살려내고, 자신도 복을 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이방의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족보에 최초의 여인으로 기록되는 엄청난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편한 길로 간 오르바는 그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갑자기 시련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느 쪽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남들이야 어려움을 당하든지 말든지, 여러분은 비교적 편하고 쉬운 길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녕 믿음의 사람이라면, 룻의 축복을 받고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룻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III. 룻의 사랑을 본받으라.
무엇보다도 룻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선택과 실행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6절에 의하면, 룻에게는 분명히 참된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선택하고 또한 자신의 말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룻이 만약에 믿음만 그렇게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억지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기쁨과 감사가 없고 짜증만 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각오하면 누구든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소망을 잃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룻은 죽음도 각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망만으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길이 계속 막히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결국에는 좌절하고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의 고향 땅에 돌아가서도 계속 어려움이 왔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룻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고난을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아닙니까? 룻에게는 그 사랑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기적인 믿음과 소망으로 하면, 나의 만족과 나의 유익을 위해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사랑에서 나오는 믿음과 소망으로 한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고 그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풍성함을 나눌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슬픔과 고통 또는 빈곤함이 임할 때에도 그것들을 함께 나누고 함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와 같지 않습니까! 내가 지치고 쓰러질 때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사랑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시게 하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고통당할 때, 삶의 소망을 잃어버릴 때 시어머니와 함께 나누었던 룻의 사랑을 본받읍시다! 그리하여 풍성하든지 빈곤하든지 모든 환경을 오히려 지배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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