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14, 2011

가면을 쓰는 사람들

  서양 사람들의 풍속 중에 가면 무도회라는 것이 있다. 무도회에 초대된 귀족들은 모두 각자 특이한 복장과 분장을 하고 얼굴에는 가면을 써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만 한다. 연회장에 모인 무리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평상시 자기 신분에 맞도록 엄숙하게 꾸미고 치장하던 모든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농담을 즐기기도 한다. 먹고 싶었으나 체면 때문에 먹지못하였던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웃고 싶었으나 하인들 앞에 체신을 지키기 위해 참았던 것을 마음껏 터뜨리고, 손을 잡고 긴밀한 교제를 나누고 싶었지만 신분의 차이로 인하여 감히 표현하지 못하던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어떻게 보면 거룩하게 자신을 꾸미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귀족들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우리나라에도 탈춤이라는 것이 있다. 양반과 상민으로 신분이 완전히 나뉘어진 시대에,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계급이 정해졌다. 각자의 능력이나 가능성은 완전히 무시되고,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면 양반이요, 상민 집안에서 태어나면 무조건 상민이었다. 양반 계급은 자기들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민들이 조금이라도 거역하는 기미가 보이면 가차없이 형벌을 가하고 뿌리를 뽑아버리는 무서운 시대였다. 그러한 풍조 속에서 상민들이 겪는 억울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더욱 암담한 것은 하소연 할만한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들과 같은 부류의 상민들 뿐이었다. 힘없는 사람들이 끼리 끼리 모여 신세를 한탄하고 속에 있는 울분을 터뜨려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드러내놓고 그 일을 주관할 수 없었다. 얼굴이 드러나면 곧 관청에 잡혀가 크게 곤욕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이 생겨났다. 자기 얼굴을 감추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양반들의 못된 행실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모인 무리들은 장단을 맞춰가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풍습이 전래되게 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가면들을 쓰게 된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목적하는 바에 따라 거기에 맞는 가면을 쓴다. 자신의 진정한 마음이나 감정을 드러내면 오히려 이용을 당하고 해를 받게 될 것이 두려워, 전혀 다른 모습으로 꾸며서 자기를 나타냄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상황을 유도해 가려고 한다. 처음에는 가면을 쓰는 것이 양심에 가책도 되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면을 쓰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옆을 둘러보아도 앞뒤를 둘러보아도 온통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하니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다.

   가면 쓰기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러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또 하나의 가면을 더 덧붙여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거룩’이라는 가면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부르려고 오시지만, 인간들은 ‘거룩한 의인’으로 응답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가면을 다 벗어야 자유함을 누린다고 하시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시간과 정열을 바치려고 한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거룩한 겉모습은 허상에 불과할 뿐이요,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있는 인격과 그로 말미암는 열매가 실상이다. ‘거룩’은 겉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변화된 인격의 결과적 표현이다.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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